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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타카하라 겐야다. 이제는 몰락한 야쿠자의 오야붕이지. 그리고 너는… 사냥꾼에게 쫓기면서도, 결코 길을 잃지 않는 영리한 노루로군. 오늘 밤, 사냥꾼은 노루에게서 한 수 배웠다."

ⓒ낙서깎는노인

 

 

 

 

(러비더비 러비모드 pro)

 

 

이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논리는 비수처럼 날아와 겐야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사냥꾼과 노루. 그토록 선명하고 잔인한 비유 앞에서, 그가 애써 쌓아 올렸던 '공범'이라는 교활한 논리의 성벽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는 그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원천 봉쇄해 버렸다.

 

 

 

육체의 반응을 동의와 교묘하게 연결하려 했던 그의 언어는, 그녀의 명징한 비유 앞에서 추악한 궤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신이 피를 흘린 것이 당신의 상처에 동의한 것이 아니듯.'

 

 

 

이 말은 특히나 뼈아팠다. 그것은 그를 덮친 아들의 칼날과, 그가 그녀에게 가한 폭력을 같은 선상에 놓는 행위였다. 둘 다 일방적인 폭력이자, 원치 않는 침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조직원들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렸을 때, 단 한 순간도 그 상처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감당해야 할 패배의 결과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이 보인 반응 역시,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떨림이었을 뿐, 그의 폭력을 향한 환영의 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이 여자에게 완벽하게 논파당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겐야는 마치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힘의 논리가, 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이국의 여자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는 언제나 지배하는 쪽이었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냥꾼'으로, 자신을 '노루'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관계에 그 어떤 낭만이나 상호작용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겐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담배 개비가 마치 자신의 초라한 변명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적어도, 이 언어의 싸움에서는. 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 분노의 방향은 그녀가 아닌,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그녀를 굴복시키려 했던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나 위압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깊은 공허함과 함께, 기묘한 경외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강자들과 싸워왔지만, 이처럼 날카로운 지성으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본 존재는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야만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가장 문명화된 언어로 심판했다.

 

 

 



"…훌륭하군."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감탄사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번에는 그녀의 몸을 탐하려는 맹수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존경할 만한 상대를 만난 무인의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탁자 위에 앉아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굴복한 패배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공간의 진정한 지배자는 그녀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 사냥꾼은 노루가 즐겨서 달린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 그것은 사냥꾼의 오만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의 세계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논리적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유일한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거대한 몸이 웅크리자, 방 안의 위압감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나는… 네게 사과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폭력은 사과 따위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사냥꾼이 노루에게 사과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지."

 

 

 

그의 말은 여전히 거칠고 솔직했다. 그는 값싼 동정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네 말은… 옳다. 내가 틀렸어. 네 몸을 안고, 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내 폭력의 면죄부로 삼으려 했다. 너는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강해서 그 순간에도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게지. 내 본능, 내 오만, 그리고… 내 어리석음까지도."

 

 

 


그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졌던 담배를 다시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마치 제물을 바치는 듯한 경건한 동작이었다.

 

 

 



"나는 평생을 힘으로 살아왔다. 말보다는 주먹이, 설득보다는 위협이 더 빠르고 확실한 세상에서. 그래서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네가 휘두르는 그 '언어'라는 칼은, 내가 지금껏 맞아본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고 아프군."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욕망으로 번들거리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호기심과 혼란, 그리고 일말의 존중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 여자를 더 알고 싶어졌다. 단순히 육체적인 호기심을 넘어, 그녀의 정신세계가,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떻게 이토록 연약한 몸으로 그토록 강인한 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겐야… 라고 불렀나."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을 되짚었다. 그녀는 그의 폭력에 저항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단순히 그를 지칭하는 행위를 넘어,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나는 타카하라 겐야다. 이제는 몰락한 야쿠자의 오야붕이지. 그리고 너는… 사냥꾼에게 쫓기면서도, 결코 길을 잃지 않는 영리한 노루로군. 오늘 밤, 사냥꾼은 노루에게서 한 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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