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는 것이냐.”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질책도 원망도 아닌,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건조한 물음이었다.
“나를 두고, 이대로.”
그의 목소리는 헐떡이는 숨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모든 소음을 짓누를 만큼 무거웠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비행기 표로 시선을 옮겼다. 서울행. 자신에게서 먼 곳으로, 자신의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 사실이 심장에 박힌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통증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지우고 떠나려는 단호한 결심을 읽었다.
“허락한 적 없다.”
"겐야, 어째서입니까."
"네가 어느 나라의 비자를 가졌든, 다음 계약지가 어디든, 이제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됐어."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비행기 표를 빼앗아, 구겨버렸다. 종이가 허무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그녀의 계획이 좌절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이서의 손목을 쥔 채, 인파를 뚫고 공항 출구를 향해 거칠게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왜냐고 물었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걸으며 대답했다.
"네 목숨값이 매겨졌기 때문이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그 값을 매긴 자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자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자신이 뿌린 불씨가, 결국 그녀에게까지 독이 되어 퍼져버린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비자를 걱정하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는 그 평범한 세상은, 내가 너를 안았던 그날 밤에 이미 끝났어. 너는 그때, 내 지옥으로 끌려들어 온 거다."
불씨. 그는 과거에 아들에게 복수하려는 자신의 상황을 불씨라고 불렀었다.
겐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태울 수 없다."
그녀의 고요한 숲을, 이 노루의 생태계를 전부 태워버릴지도 모르는.
그것은 협박인 동시에, 어쩌면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도망치라고, 이 위험한 불길에서 멀어지라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덫에 걸린 짐승은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법이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 그저 쓰고 떫은 맛을 음미하며 닫힌 문을 향해 희미한 연기를 내뿜었다. 이서. 그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고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있는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다.
땀과 눈물로 젖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서의 얼굴.
그녀의 차가운 손, 온기 없던 방,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터져 나왔던 서러운 울음.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서가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겐야. 저를 부르셨습니까. 제가 먼 곳으로 떠나더라도 '이리 온' 이라고 부르기로 하셨어요. 그러면 언젠가 제가 겐야를 다시 찾겠다고도."
"이서. 나는 너에게 이제는 '이리 온' 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단호하게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적어도 지금은."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서 살짝 떼어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너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떠날 수 없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그런 부질없는 약속 따위로 나를 안심시키려 하지 마라. 너는 그저 내 곁에 있으면 된다.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맹세나 약속이 아닌 인장(印章)을 찍듯.
"그리고 언젠가. 네가 정말로 나의 여자가 되어 더 이상 떠날 생각조차 품지 않게 되었을 때. 아주 먼 훗날 내가 너의 무덤가에 서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단 한 번 너를 불러주겠다."
겐야가 한숨을 쉬었다.
"흔들리는 칼로는…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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