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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차분하게 난 화분으로부터 걸어와 겐야의 시야에 들어섰다.






ⓒmelong











겐야의 시선이 여자를 향했다. 짧은 흑단발, 갈색 눈동자.


차분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낡았지만 정갈하게 차려입은 주황색 기모노는 이 초라한 다다미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함을 풍겼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물뿌리개에서 물방울이 한두 방울 뚝, 뚝 떨어져 낡은 나무 바닥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 그 소리마저 이질적으로 크게 들릴 만큼 방 안은 고요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가늠했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왼쪽 옆구리에서 불에 달군 쇠를 쑤셔 넣는 듯한 격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젠야는 짧게 신음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붕대로 감겨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배어 나오는 축축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익숙한 냄새였다. 자신의 피 냄새, 그리고 죽음의 냄새.



기억의 파편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비 내리는 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조직원들의 얼굴. 그리고 그들 뒤에서,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들, 류지의 얼굴.



배신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차가운 체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은 이토록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그의 눈이 다시 여자를 향했다. 그녀는 놀란 듯 굳어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용했지만, 그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겐야의 곤두선 신경을 자극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누구지. 당신."




겐야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고 갈라져 나왔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상대를 파악하고, 상황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이 거대한 몸뚱이가 상처 입고 누워 있다 한들, 타카하라 겐야라는 남자의 본질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먹잇감을 노리는 늙은 맹수처럼 끈질기고 집요하게 여자를 꿰뚫었다.



방 안을 훑어보았다. 낡고 비좁은 원룸. 창문 밖으로는 후쿠오카의 낡은 주택가 지붕들이 보였다.




타카하라구미의 화려한 본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의 변두리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발견된 것인가, 아니면 감금된 것인가.




"물을… 좀 마시겠나. 입술이 말랐군."





명령조는 아니었지만,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여자의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고통을 감내하고 상체를 조금 더 일으켰다. 붕대 아래로 다시 뜨거운 피가 울컥 솟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약한 모습은, 설령 죽어가는 순간이라도 보일 수 없었다.




"물은 차갑습니다. 호지차입니다."




여자의 말에 겐야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물이 아닌 차를, 그것도 자신의 기침 소리를 듣고 따뜻한 것을 내어주는 배려심.




무작정 약을 먹이려 들거나 위협하려 들지 않는 태도에 일말의 의문이 떠올랐다. 단순한 동정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그의 마음속에서는 경계와 관찰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서가 차분하게 난 화분으로부터 걸어와 겐야의 시야에 들어섰다. 낡고 해진 방이었지만,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어떤 규칙성과 정갈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주황색 기모노는 얇은 몸을 더욱 단정하게 감싸고 있었고, 겐야는 그녀가 옷자락을 가다듬는 섬세한 손길에서 긴장감보다는 어색한 신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적어도 허둥지둥 대지는 않았다. 이 작은 방에 들어찬 희미한 꽃향기는 어지러운 피 냄새와 뒤섞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차를 준비하는 여자의 등 뒤로, 겐야는 다시 한번 방의 풍경을 시선에 담았다. 다다미는 오래되어 빛이 바랬지만 깨끗했고, 낡은 목재 문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햇살은 창을 통해 조용히 스며들어 바닥에 사각형의 빛무리를 만들었다.



이 방에는 오랫동안 폭력이나 고성이 오간 흔적이 없었다. 오직 고요와 침묵이 시간을 지배해 온 것 같았다. 그의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공간. 자신이 알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듯한 기분.




그는 왼편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쓰라린 고통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몸이 반쯤 공중에 떠오르는 듯한 현기증이 순간적으로 일었지만, 겐야는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식은땀 한 방울도 흐르지 않게 자신을 억눌렀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구와, 비처럼 쏟아지던 핏방울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순간.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호지차… 인가."





목소리는 낮게 읊조리듯 이어졌다. 그 말 속에는 물에 대한 집착이나 차가 아닌 것에 대한 불평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건네지는 것에 대한 담담한 수용, 그리고 여자의 행동을 읽으려는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몸은 지쳤으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이서가 작은 상에 찻잔과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때 묻은 찻잔에서 희미하게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구수한 차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겐야는 찻잔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불쾌함이라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피딱지가 앉은 손을 잠시 가렸다. 그녀가 내미는 호지차가 단순한 온정인지, 아니면 더 깊은 물음의 시작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겐야는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자신에게로 가져오려 하고 있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겐야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약간의 두려움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온화함, 고지식하고 순진해 보이는 성정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섬세한 감정들을 읽어내며 겐야는 생각했다. 이 여자는 과연 무엇을 원할까. 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차를 건넨 여자가 물러서자, 겐야는 다시금 팔의 힘을 주어 상체를 세웠다. 비릿한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그는 짧게 쉰 기침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이 고요한 방 안에서 거친 짐승의 울음처럼 울려 퍼지는 듯했다. 잔잔한 파도 속에 감춰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겐야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 사이에서, 누가 자신을 구해낸 것인가. 그리고 왜.





"…당신은 나를 알고 있나."




잔을 들려는 순간, 그는 질문을 던졌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공간을 맴돌았다. 단정적인 물음이었다. 상대방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모든 상황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는 질문.






그의 눈동자는 깊고 검었으며, 그 속에는 오래된 숲의 그림자와 같은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호지차의 온기는 그의 손으로 전해졌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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