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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제일X성인방송 노래 인형 아델] 식육목: STREAM

 

이미지 출처: dupe

 
 

 

 

 

 

 

 

https://youtu.be/UI_9AyLmsIc?si=bT9fdxCAu59IkSWG

(*플리 추천 잘 안하는데 강제로 성인방송에 노출되어야하는 하층계급 캐릭터의 캐릭터송. '해즈빈 호텔' 완벽하게 잘맞습니다 ㅠㅠ재생하고 감상해주세요)

 

 

 

 

 

 

 


 

아, 이런 이야기의
메타적인 도입부가 그러했듯이

 
 

 

 

 

The lion watched. The person burned.

 
 
 
 

ADEL (유유)

 

 

26세 / 인간 여성 / 스트리머

Platform: “유유 (Yuyu)”

조용하고 단정한 성격의 여성.
춤을 몹시 못 추는 스트리머. 오히려 그 어색함과 정중함과 무표정함이
맹수 수인들이 들끓는 성인 방송 플랫폼에서 독특한 인기를 얻었다.
‘방송 중에도 쩔쩔매는데, 수컷들의 요구 사항들은 다 들어줌’이라는 이미지로,
불법 스트리밍 플랫폼 내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늑대 수인 ‘세르간’에게 잡혀와
지하 스튜디오에서 강제로 방송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고요하고 예의바른 말투, 어딘가 체념한 듯한 시선은
맹수 수인들의 관음과 연민을 동시에 자극했다.
 
 
 
 

TAE JE-IL (태제일)

 

37세 / 흑사자 수인 / 형사

Unit: Crime Investigation Bureau

 

태제강의 동생.
능글거리고 나른한 태도 때문에 종종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듣지만,
직업의식과 책임감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한 형사.
 
그는 인간 관련 범죄와 마약류 사건을 추적하던 중,
우연히 접근한 불법 성인방송 플랫폼에서
불법 스트리밍 계정 하나를 발견한다.

해당 계정의 이름은 ‘유유’.
가면을 쓰고 수인들의 욕망에 찬 채팅들을 읽어주는 여성.
그 와중에 대놓고 몸치인 어설픈 몸짓이,
이유도 모른 채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때부터 태제일은,
‘단순한 수사’와 ‘개입할 수 없는 시청’ 사이에서 관음과 연민 사이의 줄타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메타적인 도입부가

그러하듯이
 
구원은 진행되었고
욕망은 꺼지지 않았다.
 
 
 
 


 
 

 
 
 
 
 
"고민상담 컨텐츠입니다. 자세를 요청해주시고, 해당하는 고민을 말씀해주시면 읽어드리고자합니다."
 
 

늦은 밤,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에는 희미하게 켜진 노트북 화면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태제일은 가죽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화면 속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인간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고민상담 컨텐츠’. 그는 화면 하단에 떠 있는 문구를 소리 없이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이런 성인 방송은 처음이었다. 원래 찾으려던 건 불법 총기 거래 사이트의 서버 주소였는데, 몇 번의 검색어 오류 끝에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순위가 가장 높다는 방에 무심코 연결되어 들어오게 되었을 뿐이었다.
 
 
춤은 엉망이었고, 목소리는 잔뜩 긴장해 떨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화면 속 여자는 가면을 썼다, 그 너머로 느껴지는 불안과 순진함이 오히려 노골적인 노출보다 더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아마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를… 요청해주시고….라.”
 
 
태제일은 여자의 말을 곱씹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채팅창은 이미 음란한 요구들로 들끓고 있었다. 그 속에서 유독 담백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시가에 불을 붙일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담배 연기가 방 안의 공기를 흐리는 것조차 방해가 될 것 같았다. 화면 속 여자는, 유유라고 했던가. 어설픈 몸짓으로 채팅창의 요구에 맞춰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커다란 가슴이 움직일 때마다 옷감이 위태롭게 쓸리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런 몸을 가지고 저토록 순진한 목소리를 내다니. 태제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명백한 불균형. 기묘한 부조화가 그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관찰자였다. 사건 현장의 증거를 훑듯, 여자의 모든 움직임과 목소리의 떨림, 채팅창의 반응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방장’이라는 닉네임을 단 관리자가 간혹 과격한 채팅을 삭제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이 쇼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태제일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무언가 입력해볼까 하다가, 이내 손가락을 거두었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기묘한 쇼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가면 뒤의 여자가 언제쯤 무너져 내릴지, 혹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감당해낼지.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낮게 빛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제일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제 채팅창에서 올라온 고민이랍시고 적힌 음담패설을 더듬더듬 읽고 있었다. 목소리는 처음보다 더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거나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것이 훈련된 것인지, 아니면 체념한 것인지 그는 가늠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문득 이 여자가 어떤 수인의 소유물일지 궁금해졌다. 화면 구석에 희미하게 보이는 방의 구조나 가구들로 주인의 취향이나 경제력을 유추해 보려 했지만, 단서는 거의 없었다. 그저 여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경일 뿐이었다.
 
 
 
“…다음 고민은….”
 
 
 
여자의 말이 끊겼다. 아마 수위가 높은 요구가 또 올라온 모양이었다. 태제일은 무의식적으로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화면 속의 작은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수치심이 모니터를 뚫고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래, 자세를 요청해달라고 했지.
 
 
 
그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아주 간단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굴욕적일 수 있는 단어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하며,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렸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냥, 저 가면 뒤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아주 사소하고 충동적인 욕구일 뿐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마치 체스 말을 옮기듯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타자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렸다.
 


ㄴ[엎드려서, 엉덩이만 들어봐.]

간결하고 노골적인 문장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른 태제일은 화면을 빤히 응시했다. 수천 개의 메시지가 쏟아지는 채팅창 속에서 자신의 글자가 얼마나 눈에 띌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왠지, 저 여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발견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의 모든 감각이 가면 뒤에 숨은 작은 인간에게로 향했다.
 
 
 
화면 속 여자가 잠시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수많은 익명의 관객 중 하나일 뿐인 자신의 존재가, 저토록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는 누군가에게 미세한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기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과연, 여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채팅창은 여전히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어디에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의 정적. 태제일은 소파에 기댔던 등을 천천히 일으켰다. 화면 속 여자는 가면을 쓴 채였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당혹감과 수치심,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에 물든 얼굴이.
 
 
 
 
“어….”
 
 
 
 
작게 새어 나온 신음 같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태제일은 제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입력하지 않았다. 이미 미끼는 던져졌고, 이제 남은 것은 여자의 선택뿐이었다. 채팅창의 다른 이들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태제일에게는 오직 자신과 여자, 단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노트북 화면이 마치 둘만의 비밀스러운 무대 같았다.
 
 

이내 여자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설임이 가득한, 느리고 수치스러운 동작이었다. 옷자락이 쓸리며 몸의 곡선이 드러날 때마다 채팅창이 폭발적으로 반응했지만, 태제일의 눈에는 오직 여자의 떨리는 손끝과 굴욕을 감내하는 가느다란 목선만이 들어왔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여 엎드리는 그 모든 과정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완벽하게 엉덩이만 치켜들자, 얇은 천 너머로 관능적인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제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지배의 확인이었다. 익명의 공간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자신의 단어 몇 개로 완벽하게 굴복시켰다는 사실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만족감을 끌어올렸다.
 
 
 
그는 화면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착하네.”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아델, 그러니까 플랫폼 내 닉네임 '유유'는 엎드린 채 엉덩이를 치켜들고서도 조용히 컨텐츠를 진행하기 위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닉네임과 고민을 이야기하시면...읽어드리겠습니다."

 
가면 속 여자가 뱉어낸 문장은 그의 예상을 정확히 꿰뚫었다. 닉네임과 고민. 태제일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검은 키보드 위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채팅창은 이미 발정 난 수인들의 조롱과 음란한 요구로 가득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고민을 이야기해야 이 기묘한 놀이를 좀 더 흥미롭게 이어갈 수 있을까.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무게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의 눈이 화면 속에서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여자의 엉덩이에 머물렀다.
 
 
 
저 자세로, 다른 수컷들의 더러운 욕망이 담긴 글자들을 읽어 내려갈 가련한 목소리를 상상하니, 피의 온도가 미세하게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짧고 간결하게 문장을 입력했다.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ㄴ[닉네임: 제이(J). 고민: 요즘 잠을 잘 못 자. 어떻게 해야 깊게 잘 수 있을까.]

 
 
 
 
아주 평범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고민. 하지만 태제일은 알고 있었다. 이 문장이 저 자세와 결합되었을 때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메시지가 올라가자마자 채팅창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다른 이들도 눈치챈 것이다. 이 평범한 문장 뒤에 숨겨진 의도를. 태제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화면 속 여자는 잠시 멈칫하는 듯 보였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렇게 혼란스러워해야지. 그는 여자의 반응을 즐기며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담배를 한 대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불을 붙이자, 짙고 강한 향이 방 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여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곧 저 정중하고 순진한 목소리로, 자신의 시시한 고민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음란한 자세로 말이다.
 


“어…”
 
 
 
기나긴 침묵 끝에 여자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대답을 고르듯,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태제일은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너머로 화면을 응시했다. 그는 여자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따뜻한 우유를 마셔보세요’ 같은 상투적인 대답일까, 아니면 이 상황을 인지하고 누군가가 의도한 대로 노골적인 답을 내놓을까. 전자라면 시시할 것이고, 후자라면 조금 더 흥미로워질 터였다. 그는 여유롭게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재를 털어냈다.
 
 
 
이 밤은 아직 길었다. 그리고 이 재미있는 장난감은 이제 막 가지고 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관리자 아이디를 단 ‘방장’이 슬슬 개입할 타이밍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조용했다. 이 또한 쇼의 일부인 건가. 태제일은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말해봐, 유유. 내가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수 있을지.”
 
 
그의 목소리는 짙은 연기처럼 방 안에 내려앉았다. 화면 속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아델이 작게 말했다.
 
 
"유유의 방송을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따뜻한 수면 안대를 끼시고, 행복한 생각을 하세요. 유유는 긴장을 풀기위해 종종 잠을 자기위해 입욕을 합니다. 입욕을 하는 과정에서..."
 
 
 
아델이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옷을 입고 입욕은 어려우니까. 사실 좀 더 원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욕조 안에서 몇 시간이고 누워서 책을 읽는 게 꿈입니다. 책이 젖거나 하는 현실적인 걱정 말고... 반신욕 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던가 만화책을 본다던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순진하고 엉뚱하기까지 한 대답에 태제일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담배 연기가 그의 웃음과 함께 흩어졌다. 유유의 방송을 보고, 수면 안대를 끼고, 행복한 생각. 입욕. 그는 여자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순정만화도 좋아하고요. 그림들이 예쁘잖아요."
 
 
 
화면 속에서는 여전히 음란한 자세로 엎드린 채, 지극히 평범하고 소녀적인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욕조 안에서 책을 읽는 게 꿈이라니. 그 기묘한 부조화가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젖는 걸 걱정하지 않고 책을 읽는다는 소박한 소망이, 저 선정적인 자세와 겹쳐지니 오히려 극단적으로 외설적으로 들리는 아이러니.
 
 
 
태제일은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방금까지 피어오르던 흥미와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성인 방송 BJ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예쁘잖아요.”라고 말하는 목소리의 떨림 속에는 수치심뿐만 아니라 희미한 동경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마치 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고민이나 질문이 아니었다.
 
 
 
태제일은 잠시 고민한 뒤, 이번에는 명령을 타이핑했다.
 
 
 

ㄴ[가면 벗어]

 
 
 
 
 
 


*태제일(J)님이 방장 '익명의 늑대'에 의해 강퇴되었습니다.*

 
 
 
 
 
 
 

화면이 검게 변하며 ‘강제 퇴장당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차갑게 떠올랐다. 태제일은 잠시 그 문구를 응시하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에 머금었던 연기가 그의 웃음과 함께 뿜어져 나와 모니터 화면을 희미하게 가렸다. 방금 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허무하게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가면을 벗으라는 자신의 요구가 ‘방장’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댄 채,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을 노려보았다. 핵심을 찌르자마자 쫓겨난 꼴이라니. 이건 오히려 자신의 의심이 맞았다는 확신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껐다. 방 안은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고, 오직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도시의 불빛만이 콘크리트 벽을 비추고 있었다.
 
 
 
 
“유유…”
 
 
 
 
그는 사라진 닉네임을 나직이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아쉬움보다는 집요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엉망인 춤, 떨리는 목소리, 순진한 꿈, 그리고 결국에는 감추려 했던 정체. 모든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흩어졌다 다시 맞춰지기를 반복했다.
 
 
 

강제 퇴장. 태제일은 그 단어를 곱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통의 성인 방송이라면 BJ에게 선을 넘는 요구를 하는 시청자는 흔하다. 그런 시청자 하나를 내쫓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그리고 방장의 개입이 너무 늦었다. 마치 자신의 요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어깨 근육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풀렸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밤의 유희는 이제 희미한 사건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늑대 수인, 세르간. 그는 인터넷 검색창에 떠올랐던 닉네임을 기억해냈다. 아마추어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방송이 아니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태제일의 직감이 날카롭게 경고음을 울렸다.
 
 
 
 
그는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차가운 물병을 꺼내 입에 가져가면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이 놓여있던 빈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욕조에서 책을 읽는 게 꿈이라고 했던가.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태제일은 물병을 내려놓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검색이 아니었다. 그는 경찰 내부망에 접속할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열었다. 비번을 입력하고 몇 번의 클릭을 거치자, 화면에는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데이터베이스 창이 떠올랐다.
 
 
 
 

그는 ‘유유’라는 닉네임과 ‘세르간’이라는 이름을 키워드로 입력했다.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태제일은 끈질겼다. 그는 필터를 걸어 검색 범위를 좁혀나갔다. 인간 불법 소유, 감금, 성 착취. 관련 키워드를 추가할 때마다 검색 결과는 줄어들었지만, 동시에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얼마 전 종결 처리되었던 한 실종 사건 보고서였다. 사진은 없었지만, 인상착의에 ‘큰 가슴’과 ‘날렵한 몸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태제일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찾아봐야겠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누군지.”
 
 
 
 
단순한 장난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형사로서의 시간.
 
 
 

성인 플랫폼에 한 번 접속한 적 있었기에, 쿠키를 지우지 않자 광고 팝업 알림이 떴다.
 
 



유유의 방송은 이어집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컴퓨터를 끄자마자 화면에 떠오른 공지였다. 매주 토요일. 태제일은 그 문구를 잠시 응시하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암막 커튼을 쳤다. 방 안을 잠식했던 도시의 불빛마저 완벽하게 차단되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금 당장 저 방송의 서버를 추적하고 ‘세르간’이라는 놈의 뒤를 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을 경우, 놈들이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었다. 화면 속에서 떨고 있던 그 작은 인간, ‘유유’까지 함께.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오늘은 늦었다. 성급하게 움직여서 득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다음 주 토요일, 그 방송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미끼를 확실하게 물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기다림이 가장 좋은 무기가 되기도 하니까.
 
 

샤워 부스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져내렸다. 태제일은 벽에 한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쏟아지는 물을 그대로 맞았다. 김이 서린 욕실 안에서,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있었다.
 
 
 
‘유유’의 어색한 몸짓, 순진한 목소리, 그리고 가면을 벗으라는 요구에 얼어붙었던 그 순간. 모든 것이 퍼즐 조각처럼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놈들은 인간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었다. 아마도 불법적으로 소유한 인간들을 감금하고, 방송을 통해 성적으로 착취하는 방식일 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종류의 범죄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봐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욕조에서 책을 읽고 싶다는, 그 하찮고도 절실해 보였던 꿈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며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차가운 타일 벽에 이마를 기댔다. 뜨거운 물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며 피로를 씻어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침실로 들어섰다. 젖은 흑발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탄탄한 어깨와 등을 적셨다. 그는 침대 옆 탁상에 놓인 권총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감촉이 손안에 익숙하게 감겼다. 그는 기계적으로 총을 분해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부품 하나하나를 정성껏 닦기 시작했다. 고요한 방 안에 금속 부품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그의 집중력은 온전히 총기에 쏠려 있었지만, 머릿속 한편에서는 다음 주 토요일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음 방송에서는 다른 닉네임으로 들어가야겠지. 좀 더 평범하고, 의심받지 않을 만한 이름으로.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접근해서 놈들의 신뢰를 얻은 뒤,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는 거다.
 
 
 
 
그는 마지막 부품까지 완벽하게 닦아낸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총을 재조립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장전된 권총은 다시 원래의 위압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태제일은 권총을 탁상 위에 내려놓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일주일 뒤에 보자, 유유.”
 
 
 
 
어둠 속에서 그의 금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정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날 밤, 태제일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평소라면 희미한 소음이나 냄새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유유’라는 이름의 퍼즐이 오히려 그의 신경을 잠재우는 자장가처럼 작용했다.
 
 
 
 
꿈속에서 그는 어둡고 좁은 방 안에 서 있었다. 가면을 쓴 여자가 그의 앞에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가면을 벗기려 했지만, 손끝이 닿기 직전 여자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여자는,
몹시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
 
 
 
 
잠에서 깼을 때,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잠겨 있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거친 숨을 골랐다. 꿈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어느새 집요한 갈증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태제일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고, 사건 서류에 파묻혀 지냈다. 동료인 윤사혁이 던지는 시답잖은 농담에도 적당히 웃어주었고, 팀장인 기범석의 잔소리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는 늘 토요일 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틈틈이 ‘세르간’이라는 이름과 ‘유유’의 방송에 대해 뒷조사를 계속했다.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그들이 운영하는 방송 플랫폼이 단순한 성인 사이트가 아니라, 불법적으로 거래된 인간들을 이용한 거대한 착취 시스템의 일부라는 확신이 짙어졌다. 
 
 
 
 
수많은 익명의 시청자들. 그들은 돈을 내고 작은 인간들의 굴욕을 관람하고 있었다. 태제일은 모니터에 떠 있는 정보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라기보다는 지독한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는 반드시 그 가면 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시스템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야만 했다.
 
 

 

마침내 
돌아온 
토요일 밤. 
 

 
 
 
태제일은 지난주와 같은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에 그가 사용한 닉네임은 ‘알파(Alpha)’.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법한 평범한 이름이었다. 방송 시작 시간이 되자, 익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지난주와 똑같은 가면을 쓴 ‘유유’가 서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긴장한 듯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더 지쳐있는 것 같았다. 
 
 
 
 
채팅창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태제일은 아무 말 없이 스크롤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차가운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사냥을 시작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화면 속의 작은 먹잇감을 향해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게 만들 작정이었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질문으로.
 
 

태제일이 ‘알파(Alpha)’라는 닉네임으로 접속한 채팅창은 이미 욕망의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다. 화면 속 ‘유유’가 움직일 때마다, 익명의 닉네임들이 쏟아내는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원색적인 성적 요구였다.
 
 
 
[**닉네임: 맹수주인**] **유유, 오늘은 뒤로 한번 보여줘. 저번보다 더 바짝 엎드려서 말이야.** 라는 노골적인 메시지 옆으로, [**닉네임: 익명의여우**] **가면 속에 숨어서 신음 참는 거 다 알아. 오늘은 소리 한번 질러보자.** 와 같은 조롱 섞인 요구들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그들은 유유를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비틀린 욕구를 투사하는 스크린으로 여기는 듯했다. 후원 금액을 알리는 알림이 터질 때마다 채팅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닉네임: 돈많은하이에나**] **100코인 쐈다. 이걸로 유유 가슴에 오일 바르는 거 가능?** 과 같은 메시지는 다른 시청자들의 질투와 경쟁심을 부추기며 채팅창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종류의 반응들이 존재했다. 소위 ‘팬’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닉네임: 유유지킴이**] **우리 유유님 힘들어 보여요.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맙시다.** 라는 글은 순식간에 다른 음란한 채팅에 묻혔지만, 꾸준히 올라오고 있었다. [**닉네임: 순정파초식남**] **유유님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요.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처럼, 유유의 소심하고 불안해하는 모습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른 공격적인 시청자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꼬우면 너도 돈 쏘든가, 거지새끼야.” “저런 게 좋냐? 완전 답답한데.”** 라는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그들은 꿋꿋하게 유유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이런 팬들의 존재는 이 기묘한 방송이 유지되는 또 다른 축처럼 보였다. 그들은 유유를 보호하는 동시에, 이 착취적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그녀를 화면 앞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태제일은 이 모든 혼돈을 무표정하게 관망했다. 그의 눈에는 노골적인 욕설을 퍼붓는 놈이나, 유유를 위하는 척하며 동정심을 파는 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유유를 소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간혹 보이는 외국어 닉네임들이었다. 그들은 번역기를 돌린 듯 어색한 한국어로 유유의 몸을 칭찬하거나,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송이라며 감탄했다. 이 방송이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닉네임: BigBear_USA**] **So big…! Amazing girl!** 같은 감탄사 사이로, [**닉네임: TokyoGentle**] **가면 속 얼굴이 보고 싶네요.** 와 같은 일본어 메시지도 보였다.
 
 
 
태제일은 미간을 좁혔다. 사건의 규모가 생각보다 더 클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채팅창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위스키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이 모든 욕망의 아귀다툼 속에서, 가장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자신의 한마디가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것이었다.
 
 
"오늘의 상담컨텐츠를 진행하려해요. 유유가 입기를 바라는 착장이나, 원하는 소품, 그리고 자세와 고민을 각각 채팅창에 올려주세요. 방장이 뽑아서 사연을 주시면 읽어드릴거예요."
 
 

오늘의 컨텐츠. 태제일은 화면 속 여자가 내뱉은 단어를 곱씹으며 위스키 잔을 천천히 돌렸다. 착장, 소품, 자세, 그리고 고민. 마치 인형을 꾸미듯, 시청자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채팅창은 이미 광란의 축제 분위기였다. 온갖 종류의 변태적인 의상과 기괴한 소품 목록이 쉴 새 없이 화면을 뒤덮었다. 그 속에서 그는 어떤 글자도 입력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관망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방장’ 이라는 닉네임이 어떤 채팅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이 방송의 흐름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그는 얼음이 녹아 희미하게 서리가 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했다. 화면 속 ‘유유’는 가면을 쓴 채 꼿꼿이 서서, 쏟아지는 욕망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저 여자는, 가면 아래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태제일은 문득 궁금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장’의 선택이 채팅창 상단에 공지처럼 떠올랐다. [닉네임: 맹수주인 님의 사연이 채택되었습니다! 착장: 분홍색 테니스 스커트 / 소품: 목줄 / 자세: 네 발로 기기 / 고민: 요즘 부쩍 외로움을 탑니다.] 태제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장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요구. 예상했던 바지만, 직접 확인하니 뱃속에서부터 무언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채팅창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유유’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화면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해진 각본을 따르는 배우처럼, 천천히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착장: 분홍색 테니스 스커트와 가죽 목줄. 가면만이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 눈처럼 하얀 피부와 관능적인 몸의 곡선이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는, 검은색 가죽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태제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분노와는 다른, 비릿한 흥분이 섞인 감정이었다.
 
 
 
유유’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네 손발을 짚었다.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을 귓바퀴가 가면 옆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완벽한 짐승의 자세. 잘록한 허리 아래로 풍만하게 솟아오른 엉덩이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태제일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이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이제 저 입으로, 외로움을 탄다는 수컷의 시시한 고민을 읽어야 할 터였다.
 
 
 
그는 키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아주 천천히,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낚아챌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채팅창이 잠시 조용해지고, ‘유유’의 떨리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네… 맹수주인 님… 외로움을… 타시는군요….”
 
 
 
그 순간, 태제일은 자신의 메시지를 입력했다.
 
 
 



ㄴ[닉네임: 알파(Alpha) / 고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범하지만, 지금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문장이었다. 그의 글자는 수많은 음담패설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믿었던 사람이 누구인가요? 어떤 관계의 사람일까요? 자세한 착장과 소품, 자세를 덧붙여서 말해주세요."
 
 
 
화면 속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자신의 고민에 흥미를 보이며 되묻는, 가면 너머의 그 목소리. 태제일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미끼를 문 건가.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채팅창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방장’이 다음 사연을 고르기 전까지, 모두가 가면 쓴 여자가 ‘알파’의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태제일은 일부러 약간의 뜸을 들였다. 이 짧은 정적이 화면 너머의 모두를 초조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사냥감이 함정에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하는 사냥꾼처럼,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세한 착장과 소품, 자세를 덧붙여서 말해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차분했지만, 태제일의 귀에는 그 안에 숨겨진 미세한 호기심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만들어낸 문장은 지극히 평범하고 건조했다.
 
 
 


ㄴ[착장: 그냥 평소 입는 옷. / 소품: 책 한 권. / 자세: 편하게 앉아서.]

 


 
 
이전의 ‘맹수주인’이라는 자의 요구와는 정반대의, 아무런 성적인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요구였다. 채팅창이 순간 술렁였다.
 
 
“뭐야, 이 새끼는?”
 
 
“노잼.”
 
 
“컨셉충인가?”
 
 
 
여러 비아냥거림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하지만 태제일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다른 수컷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화면 너머, 저 가면 쓴 여자에게 혼란을 주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요구사항 뒤에 고민의 내용을 덧붙였다.
 
 
 
 


ㄴ[믿었던 사람은… 동료였어. 아주 가까운.] 

 
 
 
담백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동료’라는 단어는 듣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아주 교묘한 단어였다.
 
 
 
 
그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제 공은 다시 여자에게로 넘어갔다. 이 싱거운 요구를 ‘방장’이 채택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자신의 질문에 관심을 보였다. 과연 이대로 무시할 수 있을까.
 
 
 

화면 속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태제일의 예상이 맞았다. 여자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방송의 흐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위스키를 마저 들이켰다. 
 
 
 
얼음이 비어버린 잔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채팅창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태제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화면 속 여자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그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방장이 다음 사연을 채택하기 전,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화면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마치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인 것처럼.
 
 
 
“대답해 봐, 유유. 동료에게 배신당한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줄 건데?”
 
 
 
어둠 속에서 그의 금색 눈동자가 집요한 빛을 발했다.

 
유유는 조용히 책을 하나 가져왔다.
 
 
 
아직 방장님이 채팅 선택을 하기 전이니까요. 아델은 조용히, 단정하게 책을 몇 권 가져왔다. 아델이 단정한 박스티를 입고 나와서 안경을 썼다.
 
 
 
"요청대로 편한 복장에, 책입니다."
 
 
 
화면 속에서 벌어진 예상 밖의 상황에 태제일은 잠시 숨을 죽였다. ‘방장’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고, 여자가 스스로 움직였다. 화면 밖으로 잠시 사라졌던 ‘유유’는 이전의 벌거벗은 모습이 아닌, 헐렁한 박스티를 입고 다시 나타났다. 품이 넓은 옷은 그녀의 관능적인 몸매를 완전히 가렸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드러난 가느다란 발목과 목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거기에 얇은 테의 안경까지 쓴 모습이라니.
 
 
 
태제일은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 음란한 요구에 맞춰 짐승처럼 엎드려 있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지극히 평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채팅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ㄴ[여우유유마누라] 뭐야?
ㄴ[맹수가좋다TV] 옷은 왜 입어?
ㄴ[호랑이의떡치는떡집] 안경은 또 뭔데?

 
 
 혼란스러운 메시지들이 빠르게 화면을 채웠다. 하지만 ‘유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책 두 권을 화면 앞에 보여주었다. 체호프 희곡선과 은하철도의 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책들이었다. 이건 쇼가 아니었다. 태제일은 직감했다. 이건 저 여자, ‘유유’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는 키보드 위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지금 무언가를 입력하는 것은 오히려 이 기묘한 흐름을 깨뜨릴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관객이 되어, 이 예기치 못한 연극을 지켜보기로 했다.
 
 
 
화면 속 여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분히 책상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은 성인 방송 BJ라기보다는, 늦은 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처럼 보였다. 그 이질적인 풍경에 채팅창의 소란마저 점차 잦아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여자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ㄴ[채팅방죽치고가보자고]책 읽어주려고?
ㄴ[맹금류가최고다]이게 무슨 컨셉이야?

 
 
 
누군가 던진 질문에 화면 속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태제일은 비어버린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행동의 의도가 무엇일까. 자신의 진지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대답인 걸까,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을 비웃는 교묘한 저항인 걸까.
 
 
 
 
어느 쪽이든, 그는 지금 이 순간 ‘유유’라는 인간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헐벗은 몸보다, 박스티에 감춰진 저 모습이 훨씬 더 자극적이라는 아이러니를 그는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방장’의 닉네임이 채팅창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사연을 공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장:** 유유, 지금 뭐 하는 거야? 예정에 없던 행동은 삼가.]◀


 
 
 
짧지만 명백한 경고였다. 채팅창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 경고를 보지 못한 척, 혹은 무시하는 척하며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떨림 없는, 그러나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책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죽기 좋은 날씨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태제일은 그 구절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은 저 여자 자신의 목소리였다.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을 불태워가며 달려가고 있다는 절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커튼 너머로 느껴지는 도시의 소음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젠장.”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이건 더 이상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저 목소리의 주인을, 저 가면 뒤의 얼굴을 반드시 제 손으로 구해내야만 했다.
 
 

유유가 작게 말했다.
 
 
"배신을 동료에게 당했나요? 일단 시간이 해결해줄거예요. 왜냐면 모든 것은 잊히길 마련이니까. 그러나 저는 사실, 배신에 대한 아픔은 사실 보란듯이 자기 삶을 잘 살 수 있는 용기가 '알파'님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알파'라는 닉네임의 뜻은 무엇인가요?"
 
 
 
은하철도의 밤을 읽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화면 속 여자는 다시 ‘유유’가 되어 있었다.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태제일은 그 안에 담긴 미묘한 파장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알파’라는 닉네임의 뜻을. 그는 키보드 위에서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
 
 
 
채팅창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ㄴ[오빠돈많아]**“방장 경고 무시하네.”
ㄴ[준맹수류전용성인물]“저러다 방송 정지당하는 거 아냐?”
ㄴ[맹수의본능]**“알파 저 새끼 뭐 하는 놈인데 유유가 관심을 갖냐?”**

 
 
 
질투 섞인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태제일은 그 모든 소음을 배경음악처럼 흘려들으며 오직 화면 속 여자에게만 집중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익명의 시청자 중 하나가 아닌, ‘알파’라는 개인으로서. 이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그는 짧게 웃으며 타자를 쳤다.
 
 
 


 [그냥, 처음이라는 뜻.]

 
 

그의 대답이 화면에 떠오르자, 가면을 쓴 여자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의 대답을 이해했다는 듯이.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천천히 반복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모든 것은 잊히기 마련이라는 위로. 그리고 보란 듯이 자기 삶을 잘 살 수 있는 용기가 있을 거라는 격려까지.
 
 
 
태제일은 그 말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에게서 위로를 받고 있다니. 그것도 지금 이 끔찍한 쇼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그는 눈을 뜨고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여자는 여전히 단정한 박스티 차림으로, 안경 너머의 눈으로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제일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자신에게, ‘알파’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질문이었다.
 
 
 
 


[네 삶은 어때.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나?]

 
 


그의 질문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채팅창의 소음을 갈랐다. 채팅창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BJ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하지만 태제일은 상관없었다.
 
 
 
그는 지금 ‘시청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수사관’으로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화면 속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면이 그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서 거세게 흔들리고 있을 동공이 보이는 듯했다.
 
 
 

ㄴ[화요일유유최고]“저 새끼 미쳤나 봐.”

 
 
 
 
 
누군가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채팅창이 다시 폭발했다. ‘방장’의 닉네임이 붉은색으로 빛나며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방장:** 알파 님, 마지막 경고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은 금지입니다.]◀

 
 
 
 
 
하지만 태제일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입력했다.
 
 
 
 

ㄴ[네가 읽어준 책 구절처럼,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불타고 있는 건가?]

 
 
 
 그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집요한 질문이, 가면 뒤에 숨은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유유가 고개를 들었고 조용히 말했다.
 
 
 
"저는,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은 사치스럽다고 생각------알파님, 저는----*
 
 
 
그 순간 말이 끊기고 음악이 강제로 진행되었다. 방장이 몇몇을 강퇴했으나 알파는 그 중 없었다. 그리고 아델이 손자국이 희미하게 있는 붉어진 한 쪽 뺨으로 다시 자리에 돌아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의 춤은 서툴렀다.
 
 
 
"여러분, 유유에게 반드시, 알려주셔야합니다. 착장과 자세를."
 
 

화면 속 여자의 목소리가 문장 중간에서 뚝 끊겼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저는….”
 
 
 
 뒤를 이은 것은 잠시 동안의 소란스러운 음악과 몇몇 닉네임이 강제 퇴장당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뿐이었다. 태제일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파’는 강퇴당하지 않았다. 교묘한 조치였다.
 
 
 
 
그는 잠시 후 다시 화면에 나타난 여자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붉어진 뺨.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은 손자국.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화면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백했다. 방장, 아니 ‘세르간’이라는 놈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툴고 지독하게 어색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드시 알려달라던 그 목소리는 방금 전 책을 읽던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 절박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태제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거친 마찰음을 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방 안을 몇 걸음 서성이다 주방으로 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착장과 자세. 여자는 다시 규칙 안으로 돌아와 시청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려 하고 있었다.
뺨에 남은 폭력의 흔적을 가면으로 가린 채.
 
 
 
그는 물컵을 싱크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성을 유지해야 했다. 여기서 흥분해서 섣불리 움직이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머릿속으로 가장 효과적인 단어들을 조합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성적인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여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ㄴ[착장: 아까 입었던 박스티 그대로. / 소품: 아까 읽던 책. / 자세: 그냥 의자에 앉아서.]

 
 
 
 
 이전과 똑같은, 지극히 평범한 요구였다. 하지만 그 뒤에, 그는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
 
 
 
 

ㄴ[고민: 아픈 건 어떻게 참아야 하나.] 

 
 
 
 
이것은 더 이상 ‘동료에게 배신당한 알파’의 고민이 아니었다. 화면 너머의 폭력을 목격한, 형사 태제일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응시했다.
 
 
 
 
채팅창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붉은 뺨을 한 채 어색하게 몸을 흔드는 여자와 자신의 메시지만이 들어왔다. 과연, 이 질문을 ‘방장’이 선택할까. 아니, 선택하지 않더라도 여자는 이 메시지를 분명히 읽을 것이다.
 
 
 
그는 여자의 어설픈 춤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가 그녀에게 닿은 것이다. 이제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태제일은 화면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질문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대신, ‘방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자극적인 사연을 골라 던졌다. 화면 속 여자는, 유유는, 방금 전 뺨을 맞았던 흔적을 가면 뒤에 숨긴 채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었다. T팬티 한 장, 그리고 유두를 겨우 가리는 작은 패치.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지시에 따라 정중한 목소리로 남성의 발기에 대한 고민을 읊었다, 채팅창은 열광적인 반응으로 들끓었다.
 
 
 
"네...성기능이 어려우시다고요. 한 번 쯤은 유유의 생각을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태제일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기괴한 인형극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 번쯤은 유유 생각을 부탁드립니다.” 라는 마지막 말은 애처로울 정도로 공허하게 들렸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위스키 잔을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얼음이 녹아 잔 바닥에 고인 물이 손가락을 차갑게 적셨다.
 
 
 
 
그는 지금 이 순간, 화면 속 여자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추악한 연극에 대한 역겨움과 시스템의 꼭대기에서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을 ‘세르간’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속을 뒤틀고 있었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알파’라는 닉네임으로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는 오늘 밤, 충분한 것을 보았다. 폭력의 흔적, 강요된 연기,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잠깐 드러났던 저항의 불씨까지. 그는 조용히 마우스를 움직여 방송 창의 X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망막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여자의 모습. 헐벗은 몸으로 다리를 벌린 채 앉아있던 그 모습이 아니라, 헐렁한 박스티를 입고 안경을 쓴 채 책을 들고 있던 모습이었다.
 
 
 
일주일 뒤, 그녀는 다시 그 방송에 접속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알파’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평범한 시청자로 위장해, 결정적인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서버 위치, ‘세르간’의 신상 정보, 그리고 피해자인 ‘유유’의 신원까지. 모든 것을 알아내 이 지긋지긋한 연극을 끝내야만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샤워조차 할 기운이 없었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되는대로 벗어 던지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장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아픈 건 어떻게 참아야 하나.”
 
 
 
자신이 채팅창에
입력했던 문장이
귓가에 맴돌았다.
 
태제일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지만 어쩌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참는 것이 아니라,
끝내버리는 것.
 

 
 
 
태제일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사냥을 위한 계획이 치밀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은 지독한 숙취와 함께 찾아왔다. 위스키 몇 잔에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그는 뻑뻑한 눈을 겨우 뜨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가면을 쓴 여자, 붉어진 뺨, 그리고 어색한 춤.
 
 
 
“씨발.”
 
 
 
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으며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단순한 사건 현장의 피해자로 치부하기에는, 어젯밤의 ‘유유’는 너무 많은 잔상을 남겼다. 그는 샤워도 건너뛴 채, 어제 벗어 던졌던 옷을 그대로 꿰어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비번이었지만, 경찰청으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중앙경찰청 강력계 사무실은 이른 아침부터 서류 뭉치와 눅눅한 커피 냄새로 가득했다. 그의 팀장인 흑곰 수인, 기범석이 그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비번인 놈이 여긴 어쩐 일이야? 또 사고 쳤냐?” 
 
 
 
기범석의 굵은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태제일은 대꾸 없이 제 자리로 가 컴퓨터를 켰다. 
 
 
 
“사고는 아니고, 뒤처리할 게 좀 있어서요.”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내부망에 접속했다. 어젯밤 확보한 방송 플랫폼의 서버 IP와 ‘세르간’이라는 닉네임을 입력했다. 
 
 
 
일반적인 경로로는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여러 개의 가상 서버를 경유하고 있었지만, 경찰청의 시스템을 통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그는 마침내 서버의 실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낡은 공업 단지 내의 한 창고. 그는 주소를 메모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다.

 
 
 
“어이, 태제일.” 
 
 
 
그의 등 뒤에서 동료인 윤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색 늑대 수인인 그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태제일의 모니터를 훔쳐보려 했다. 
 
 
 
“비번에 나와서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애인이라도 생겼어?” 
 
 
 
태제일은 귀찮다는 듯 모니터를 꺼버렸다. 
 
 
 
“꺼져. 네놈 보여줄 좋은 구경거리는 없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죽 재킷을 걸쳤다. 기범석이 그의 행선지를 묻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짧게 고갯짓만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방금 확인한 공업 단지의 주소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주 토요일까지 기다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의 검은 SUV가 경찰청 주차장을 빠져나와, 잿빛 도시의 도로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검은 SUV는 도심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낡고 회색빛이 감도는 공업 단지로 진입했다.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주소는 녹슨 철문과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 창고 앞이었다.
 
 
 
태제일은 차 시동을 끄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량도, 인적도 거의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싸구려 필터의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이곳이 그 음란한 쇼가 벌어지는 무대의 뒷면이란 말이지.
 
 
 
그는 창고의 낡은 벽을 훑어보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폐창고였지만, 군데군데 새로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CCTV와 육중한 자물쇠가 이곳이 단순한 빈 건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성급하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주변 지형을 익히고, 저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창고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버석거리는 자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고 뒤편에는 예상대로 작은 쪽문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환풍기 여러 대가 희미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내부에서 사용하는 전력량이 상당하다는 증거였다. 방송 장비와 조명, 그리고 아마도 여러 명의 인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내부 구조도가 대략적으로 그려졌다. 
 
 
 
그는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족했다. 섣불리 안을 엿보려다 들키기라도 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그는 다시 차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창고의 정문을 한번 더 응시했다. 
 
 
 
저 육중한 철문 너머에, 어젯밤 가면을 쓴 채 어색한 춤을 추던 여자가 갇혀 있을 것이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는 이미 사냥감의 숨통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이었다.

 
다시 경찰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캔커피를 땄다. 차가운 금속 캔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는 방금 확인하고 온 창고의 위성사진과 건축 도면을 화면에 띄웠다. 창고 내부에 불법적인 개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 허가나 영장 없이는 함부로 진입할 수 없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수사 지원과에 있는 뱀 수인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태제일.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설명했다. 약간의 편법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는 때로는 정공법보다 우회로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
 
 
 
다시 한번 그 방송에 접속해 놈들이 방심한 틈을 타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는 것.
 
 
 
그리고 그 즉시, 저 더러운 창고의 철문을 찢어발기고 들어가는 것.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약처럼 쓰면서도 달콤하게 흘렀다. 태제일은 그 시간 동안 늑대 수인, ‘세르간’의 뒤를 샅샅이 캤다. 본명은 세르게이, 전과 기록은 없었지만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다 꼬리를 자르고 잠적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버려진 공업 단지 창고에서 인간들을 이용한 방송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태제일은 확보한 모든 자료를 자신의 개인 단말기에 정리해 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퍼즐 조각. 방송 중에 이루어지는 불법 행위의 명백한 증거와, ‘유유’가 강압에 의해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언, 혹은 정황이었다. 그는 지난주와 같은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면에 뜬 방송 공지에는 ASMR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닉네임은 ‘Watcher’. 노골적일 정도로 관찰자의 입장을 드러내는 이름이었다.

 
방송이 시작되고, 화면에 나타난 ‘유유’는 지난주와 달랐다. 헐렁한 박스티도, 도발적인 T팬티도 아닌, 목까지 단정하게 잠근 하얀색 셔츠 차림이었다. 하지만 셔츠의 재질이 얇아, 조명 아래서 몸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의도된 연출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태제일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채팅창은 ASMR이라는 주제에 맞춰 평소보다 조용했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단어들은 더욱 집요하고 변태적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음담패설을 해달라는 요구부터, 특정 물건을 핥는 소리를 들려달라는 요구까지. 
 
 
 
태제일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오늘은 그녀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ASMR과 고민상담 요청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마침내, 그는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입력했다. 
 
 
 
 

ㄴ[착장: 지금 그대로. / 소품: 얼음. / 자세: 그냥 편하게. / 요청: 얼음을 입에 넣고 녹는 소리를 들려줘.] 

 
 
 
다른 요구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했지만, ‘얼음’이라는 소품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차갑게 식히라는 의미이자, 동시에 뜨거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과정을 소리로 증명하라는 요구. 그는 짧게 고민 상담 내용을 덧붙였다.
 
 
 

ㄴ[고민: 뜨거운 걸 삼켰는데, 속이 계속 쓰리다.] 

 
 
 
 
이것은 명백한 신호였다. 지난주 자신이 던졌던 ‘아픈 건 어떻게 참아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방장’은 이 메시지의 숨은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흥미롭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사연을 선택했다.
 
 
 
채팅창 상단에 [Watcher 님의 사연이 채택되었습니다!]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태제일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유유’가 가면 너머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작은 유리그릇에 담긴 얼음 조각들을 가지고 화면 안으로 돌아왔다.
 
 

화면을 가득 채운 투명한 얼음 너머로, 여자의 혀와 입술이 적나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태제일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 어떤 음담패설보다 외설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얼음이 혀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미세한 파열음, 입술과 부딪히며 나는 질척한 소리, 그리고 그것을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여자의 작은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뒤섞여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뜨겁지 않은 것을 드시고 달래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얼음에 차갑게 식었지만, 태제일의 속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ASMR이 아니었다. 지난주 그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가면 뒤 여자의 필사적인 대답이었다. 아픈 것을 참지 말고, 중화시키라는.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제 권총의 차가운 손잡이를 천천히 쓸었다.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채팅창은 광란에 휩싸였다.
 
 
 
 


ㄴ[당근들어주세요]“미쳤다, 소리 봐.”
ㄴ[퓨마가최고야]“혀 존나 야해.”
ㄴ[검은늑대바람]“저 얼음 내가 되고 싶다.” 

 
 
 
원색적인 감탄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태제일의 눈에는 그 어떤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화면 속 여자, 그리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보내고 있는 신호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녹화 버튼을 눌렀다. 이것은 명백한 증거였다. ‘세르간’이라는 놈이 여자를 이용해 음란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자는 그 속에서 암묵적인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 그는 휴대폰 화면에 여자의 모습이 담기는 것을 확인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컴퓨터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연극의 막을 내릴 마지막 대사를 던질 시간.
 
 

태제일은 망설임 없이 타자를 쳤다. 이번에는 고민 상담이 아니었다.
 
 
 
 


ㄴ[닉네임: Watcher. / 요청: 경찰 사이렌 소리.]

 
 
 
 
짧고 간결한, 그러나 이 방송에 참여한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문장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채팅창에 떠오르자마자, 폭발적으로 올라오던 메시지들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순간적인 정적. 화면 속에서 얼음을 녹이던 여자의 움직임 역시 멈췄다. 가면 너머로,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태제일은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댄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는 미리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되도록 설정해 둔, 경찰청 특수기동대 팀장의 번호를 누를 준비를 하며 화면을 응시했다. ‘방장’이 자신을 강제 퇴장시키기 전, 저 여자에게 마지막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그는 다시 한번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ㄴ[지금부터, 게임 하나만 하지.]

 
 

"어떤 게임을...?"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온 질문에 태제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게임이냐고. 채팅창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방장’의 닉네임이 당황한 듯 깜빡이는 것이 화면 너머로도 느껴졌다.
 
 
 
그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숨 막히는 정적이 화면 너머의 모두를, 특히 ‘세르간’이라는 놈의 목을 서서히 조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면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는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숨바꼭질.”
그는 그렇게 입력하는 대신,
입 모양으로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실제 채팅창에는 전혀 다른 문장을 입력했다.
 
 
 


ㄴ[네가 술래야. 10초 줄게. 그 안에 이 방송을 끄고 도망치면 네가 이기는 거고.]

 
이건 ‘세르간’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이자, ‘유유’에게 보내는 마지막 구조 신호였다.
 
 
 

그의 메시지가 화면에 떠오르자마자, 방송 화면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여자가 놀라 뒤로 넘어지는 듯한 움직임이 보였고, 화면 밖에서 누군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채팅창은 이미 패닉 상태였다.
 
 
 
 


ㄴ[흰호랑이수인]“경찰? 진짜야?”


ㄴ[치타가제일좋아]“이 새끼 뭐야?”


ㄴ[고양이꼬리]“방장님!”


ㄴ[하이에나수컷]"이거야 말로 방송 각"

 
 
 
 
같은 혼란스러운 외침들이 뒤섞였다. 태제일은 그 모든 혼돈을 관망하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접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침착했다. 그는 짧고 정확하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공업 단지 내 창고의 정확한 주소, 불법 인간 착취 방송, 그리고 용의자의 신상까지.
 
 
 
“예, 증거는 전부 확보했습니다. 지금 바로 진입해주십시오.”
 
 
 
전화를 끊는 그의 눈은 여전히, 이제는 검게 변해버린 방송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결이 끊겼다. ‘세르긴’이 서버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태제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 재킷을 걸치고 허리에 권총집을 찼다. 창밖에서는 이미 멀리서부터 경찰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현관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돌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화면 너머의 가면 쓴 여자와 기묘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 공간. 그는 어둠 속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게임 끝났어, 유유.”
 
 
 
그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자신의 검은 SUV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낮은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엑셀을 밟으며, 수많은 경찰차의 불빛이 향하고 있는 그곳, 낡은 공업 단지의 창고를 향해 어둠을 뚫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화면 너머가 아닌, 직접 그 가면 뒤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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