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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강X아델] 식육목: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환승연애AU)

(아는 지인분의 아이디어로 진행했어요.)

 

 

 

 


“그래, 방송 중이지. 아주 중요한 방송. 그래서 묻는 거야. 백성호 앞에서는 그렇게 잘만 웃어주던데, 내 앞에서는 왜 그렇게 불행한 표정만 짓는데. 그것도 방송의 일부인가?” 


나는 비꼬듯 물었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불편해? 네 전 연인은 대체 어떤 인간이었길래, 나 같은 놈 앞에서 이렇게 벌벌 떨기만 하는 건데?”


 나는 일부러 더 잔인한 말을 골라 던졌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짐승이 발악하듯, 나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의

메타적인

도입부가

그러하듯이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제강에게 제작진 중 한 명이 다가와 메모지를 건넸다.

 

 

 



‘첫 데이트 상대 지목 시간입니다. 10분 내로 결정해서 문자로 보내주세요.’


 

 

 

 

태제강은 메모지를 구겨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메모지를 손안에서 완전히 구겨버린 태제강은 그대로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에는 이미 몇몇 출연자들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그 어디에서도 멈추지 못했다. 잠시 후, 모든 출연자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첫 데이트 매칭 결과가 도착한 것이다. 태제강은 알림을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그는 그저 창가에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튜디오 안이 미묘한 술렁임으로 채워졌다. 누군가는 기쁨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각자의 데이트 상대를 확인하고 있었다. 태제강의 귀에는 그 모든 소음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와, 완전 의외의 결과인데?

 

 

 

 

혜연의 들뜬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태제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연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서 백성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휴대폰 화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태제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안에서 구겨진 메모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선택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위쪽에 있던 이름을 무심코 눌렀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태제강 씨는 누구랑 됐어요?

 

 

 

 

혜연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가와 물었다. 태제강은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낯선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그는 짧게 이름을 읊조린 후, 별 감흥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분이네요.

 

 

 

 

그의 시선은 다시 아델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임이 없었다. 백성호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친근하게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델, 우리, 잘해봐요.

 

 

 

백성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제강의 안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직하게 읊조린 그는 그대로 스튜디오를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지독하게 차갑고, 모든 것을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태제강은 다시 스튜디오 안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델과 백성호가 나란히 앉아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백성호는 연신 손짓을 섞어가며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고,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네.

 

 

 

 

태제강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자신도 모르는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멋대로 저기압으로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곧 데이트 출발해야 합니다.

 

 

 

 

젊은PD가 모든 출연자들에게 안내했다. 태제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에서 등을 뗐다. 이제는 정말로 ‘처음 보는 사람’과 어색한 데이트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스튜디오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델은 여전히 백성호와 함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태제강은 그대로 시선을 거두고 반대편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모든 시선과 소음을 완벽히 차단한 채. 어차피 이 쇼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해서 마주쳐야 할 얼굴들이었다. 그는 억지로라도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소모를 멈춰야 했다. 적어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만이라도.

 

 

 

 

 

그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쇼에 불과했다. 그는 지정된 데이트 장소로 향하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옆자리에는 오늘 처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지만, 태제강의 귀에는 그 어떤 정보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아델과 백성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둘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저기...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옆자리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염려를 애써 무시하며 태제강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거짓말이었다. 피곤한 것이 아니라, 지긋지긋했다. 이 상황도, 이런 연기를 해야 하는 자신도.

 

 

 

 

데이트 장소는 한적한 강변의 레스토랑이었다. 제작진이 의도한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달리, 태제강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와인잔만 의미 없이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레스토랑 한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갑자기 다른 커플들의 데이트 장면이 비치기 시작했다. 제작진의 악의적인 편집이었다. 태제강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아델과 백성호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한강 유람선 위에서 서로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여주고 있었다. 백성호의 장난스러운 말에 아델이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태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든 포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과 겹쳐졌다. 그는 와인잔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함께 데이트하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태제강은 더 이상의 설명이나 변명 없이 레스토랑을 나섰다. 등 뒤로 제작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따라붙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그제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열기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는 강변 난간에 기대어 어둡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물 위로 유람선의 불빛이 아득하게 번지고 있었다. 저 안에, 그녀가 있겠지. 백성호와 함께. 그 생각만으로도 속에서부터 역겨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이성적인 사고를 간신히 붙들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담당 작가가 다가왔다.

 

 

 

 

"태제강 씨, 갑자기 나오시면 어떡해요. 촬영 아직 안 끝났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난처함과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태제강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속이 안 좋아서. 바람 좀 쐬면 괜찮아질 겁니다."

 

 

 

 

변명인 줄 알면서도 작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원하는 그림은 충분히 얻었을 테니까. 고뇌하는 남자, 예전 연인의 행복한 모습에 흔들리는 남자.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완벽한 그림. 태제강은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걸었다. 결국 자신은 이 거대한 연극 무대 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맡은 광대에 불과했다.

 

 

 

"다른 분들도 곧 촬영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거예요. 같이 이동하시죠."

 

 

 

 

작가의 말에 태제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그곳에 가면 다시 그녀와 마주쳐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웃으며 인사를 나눠야 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작진의 차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레스토랑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 밤, 잠들기는 글렀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심장이 멋대로 날뛰며,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의 잔재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태제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승한 작가와 카메라 감독도 그의 싸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굳게 닫힌 거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여는 순간, 다시 연극은 시작될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익숙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거실에는 이미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상대로 아델과 백성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었지만, 태제강이 들어서는 순간 아델의 웃음이 미세하게 굳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태제강은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반쯤 비웠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들끓는 속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데이트는 즐거웠어요?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혜연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그랬습니다.

 

 

 

 

태제강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물병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혜연 너머, 여전히 백성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델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부딪혔다. 아델은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태제강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그때, 거실 스피커에서 제작진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문자 선택이 진행됩니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익명으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방송이 끝나자 거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들.

 

 

 

 

태제강은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화면에 떠오른 여러 이름들 사이에서, 그의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한 사람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는 유람선 위에서 환하게 웃던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결국, 다른 이름을 선택했다. 그리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날아올 문자는 정해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휴대폰 화면에는 차가운 안내 문구만이 떠 있었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제강은 미동도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놀랍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백성호와 유람선 위에서 웃고 있던 아델의 얼굴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화면을 끈 휴대폰을 협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가득 메운 방안에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감정과 기억들이 뒤엉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무표정한 가면과도 같았다. 이 연극이 끝나려면, 아직도 많은 밤이 남아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방문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제강 씨, 주무세요?

 

 

 

 

제작진의 목소리였다. 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젊은 작가가 서류를 든 채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내일 일정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내일 있을 ‘X 소개서’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각자 자신의 전 연인에 대해 쓴 소개서를, 모든 출연자 앞에서 낭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태제강은 서류를 건네받아 훑어보았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흩어졌다.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과거를 들추고 감정을 헤집어 놓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작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태제강은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의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 손에 들린 종이의 감촉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아델이 쓴 자신의 소개서. 그리고 자신이 써야 할 아델의 소개서. 어떤 말들로 그녀를 설명해야 할까. ‘조용하고,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 그렇게 시작해야 할까. 그는 책상 앞에 앉아 텅 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펜을 쥐었지만,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문장만이 맴돌았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펜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지독하게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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