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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육목: 북부대공X선결혼 후연애 아델 AU - 식육목 : Sovereignty

 

 

 

 

 

 

아, 이런 이야기의 메타적인 도입부가 그러하듯이

 

 

 

 

 


북부의 겨울이 그러하듯, 이미 시작된 것은 반드시 도착한다.

그리고 태제강은, 도착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센트럴에 있던 알브레히트 폰 아르겐의 결정은 계산에 가까웠다.

 

 

 

센트럴의 귀족이던 그는 북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의 딸 아델을 내놓았다.

 

 

 

아르겐의 선택에 주저함은 없었다. 아르겐에게 아델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계 구도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를 정리하는 일은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효율적인 결정이었다. 아르겐에게 아델의 혼인은 명분이었다. 혼인의 다른 이름은 아델의 처분이었다.

 

 

태제강에게 황성의 귀족이 내민 신부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존재였다. 모든 서류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아르겐의 이름은 반복해서 등장했지만, 남은 것은 계약에 적합한 조건뿐이었다. 북부와의 정치적 동맹이라는 명분은 아르겐을 체면 있게 만들어 주었다. 실상은 간단했다. 필요 없는 것을 북부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태제강은 그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태제강은 늘 알고있었다. 버려진 것은 북부에서 더 잘 살아남는다는 것을.

 

 

태제강은 신부의 얼굴을 몰랐다. 그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혼인 서류에는 필요한 정보가 모두 적혀 있었고, 이름은 명확했으며, 혼인 조건은 정제되어 있었다. 나이, 신분, 보호 조항, 양도 이후의 책임 소재까지. 얼굴이 빠져 있다는 점만이 오히려 정확했다. 그 공백은 의도된 것이었다. 즉, 황성은 신부를 인물로 소개할 생각이 없었다. 태제강 역시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북부에는 강한 군권이 있었다. 그러나 늘 정통성이 취약했다. 오래된 동부의 군벌들은 신진 북부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략적 요충지에서 철저하게 사병을 불려온 태제강은 무리 짐승의 정점 검은 사자 수인이었다. 권력을 잡은 리더에게는 명분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는 중앙과 연결된 혈연이 필요했다. 중앙 귀족들의 군사 개입 카드를 무력화 시켜야만 했다.

 

 

 

신부를 데리러 가는 길에는 눈이 내렸다. 길이 두 번이나 끊겼다. 절벽 끝에서는 말이 교체되었다. 마차는 낮과 밤의 경계를 잃은 채 북부의 평원을 가로질렀다. 수행원들은 그가 왜 그토록 서두르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태제강은 얼굴도 모르는 신부와 결혼하기 위해-가 아니라, '북부의 권한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말을 재촉했다. 신부의 이름은 센트럴의 황제와 가까운 귀족이 건넨 문서 속에서만 확인된 존재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북부의 자치권을 유지하는 것에 센트럴 귀족과의 명분은 명확하게 필요할 것이다.

 

 

그는 신부를 상상하지 않았다. 기대도, 환상도 품지 않았다. 태제강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건 정도였다. 북부에는 늘 그에 걸맞은 이유가 존재했다. 북부대공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결과였다. 사흘간의 강행군은 사랑의 증거가 아니었다. 오로지 통치자의 이동이었다. 결정된 일을 지연 없이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마차 안에서 그는 잠들지 않았다. 창밖의 설원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라 말하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 결혼을 두고 여러 소문을 만들어냈다.

 

정치적 동맹이라거나, 북부의 안정을 위한 희생이라거나, 혹은 포식자가 새로운 소유물을 맞이하는 의식이라고.

 

그러나

 

그날의 태제강은 단순했다.

 

그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고,

 

그 결말의 이름이 아델이었을 뿐이다.

 

 

 

 

북부의 겨울이 그러하듯, 이미 시작된 것은 반드시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도착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EP. 호칭

 

 

 

 

"글쎄, 뭐가 좋을까. '그대'나 '당신'은 너무 정중해서 재미가 없고… '여보'라, 그래. 그게 제일 낫군." 그는 아델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추며,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집요하게 응시했다. "특히 네가 그 단어를 부르며 부끄러워할 때, 그 목소리가 떨리는 게 꽤 듣기 좋아."

 

 

"그러나 저는 허울 뿐인 신부입니다. 조용히 있겠습니다. 센트럴의 살롱 예의 대로 '명예로운 외도'를 하셔도 좋고...이건 명분 뿐인 결혼입니다."

 

나는 찻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도자기 소리가 온실 안의 고요함을 날카롭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 정치적 필요, 센트럴의 명분, 다른 이들과의 연애.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단어들은 북부의 상황을 어설프게 짐작한 이방인 특유의 오해와 자포자기가 뒤섞여 있었다.

 

 

조용히 있겠다는 그 덤덤한 선언이 오히려 내 신경 줄 하나를 묘하게 긁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리를 꼬고 있던 자세를 풀고 상체를 아델 쪽으로 깊숙이 기울였다. 내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드리워지자, 아델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정치적 명분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 북부에서 '주인'이 된다는 건 단순히 이름만 걸어놓고 뒷방으로 물러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녀의 붉어진 귓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 아델. 북부는 센트럴과 달라. 부부의 이름만 걸어놓고 '명예로운 외도'니 하며 딴짓이나 하는 허울 좋은 귀족 놀이는 내 취향이 아니야."

나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꽃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으스러지는 꽃잎의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축축했다.

 

"내가 널 필요로 해서 데려왔다고 했지. 그 '필요'라는 단어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군."

 

짓이겨진 꽃잎을 테이블 위에 툭 털어내며 시선은 아델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명예로운 외도' 운운하는 이야기는 이곳 북부의 생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짐승들의 땅이고, 우리는 제 영역 안에 들인 반려를 그렇게 방치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소유라는 개념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배타적인 법이니까.

 

"네가 조용히 있겠다고 해서 이 성채가 널 가만히 둘 것 같나? 내가 밖으로 나도는 동안 넌 이곳에서 고립되어 말라 죽거나, 아니면 이 거친 놈들에게 씹어 먹히겠지."

 

내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단순한 겁주기가 아니었다. 대공비라는 자리는 곧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야 함을 의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 지내겠다는 건 스스로 먹잇감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정정해주지."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압도적인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치자 아델이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녀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어 가두듯 내려다보았다.

 

"내 침실에 다른 여자를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 영역에 냄새를 섞는 건 질색이라서."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역력히 보였다. 그 순진한 오해가 깨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건 꽤 짜릿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 쓸데없는 상상은 집어치우고 현실을 직시해. 넌 내 필요에 의해 왔고, 그 대가로 내 옆자리를 차지했어. 조용히 숨만 쉬고 싶다면 북부가 아니라 수도원의 독방으로 갔어야지."

 

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나는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찰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이 압박을 견뎌내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할 것인가.

 

 

명예로운 외도라. 그 말속에 담긴 순진한 포기와 알량한 배려가 거슬렸다. 나는 아델이 앉아 있는 티 테이블 끄트머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으며,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센트럴의 귀족들이 그러고 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는 차분하게 내리깔렸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 선 기운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자유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어."

 

나는 한 손을 뻗어 아델이 쓰고 있던 털 후드 끝자락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털 감촉이 손끝에 닿았지만, 내 시선은 오로지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그 '자유'라는 게 나한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오히려 모욕에 가깝지."

 

나는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내 이름이 붙은 자리에, 다른 놈의 흔적을 묻히는 꼴을 보라고? 차라리 내 손으로 성채를 허물고 말겠어."

아델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픽,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그녀 쪽으로 더 숙였다.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덮자, 아델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양팔로 그녀를 가두듯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잘 들어, 아델."

 

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울렸다.

 

"네가 이곳에 온 이유가 정치적이든 뭐든 상관없어. 일단 내 성에 들어온 이상, 넌 내 울타리 안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난 내 울타리 안의 것을 공유하는 취미 따위 없어."

 

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 그따위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네가 해야 할 일은 내 눈 밖으로 나지 않는 거야. 얌전하게 굴든, 발버둥을 치든 상관없으니 내 시야 안에만 있어."

나는 잡았던 턱을 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델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체념한 눈빛은 아니었다.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성 안 구경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가운 손이 내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왔다. 나는 그 손을 단단히 쥐고 온실 밖으로 이끌었다.

 

"다음은 서재다. 네가 좋아할 만한 얌전한 곳이지. 거기서도 그런 재미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건지 지켜보겠어."

 

온실 문을 열자 다시금 차가운 북풍이 몰아쳤지만, 맞잡은 손의 온기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작은 온기가 북부의 매서운 추위를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불씨가 되어 타오를지 묵묵히 계산하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외도. 그래, 남한텐 차마 못 할 낭만적인 단어지."

 

나는 만년필을 쥔 손을 멈칫하며, 입매 끝만 아주 미세하게 비틀어 올렸다. 펜촉에 맺힌 잉크 한 방울이 서류 귀퉁이에 작게 번져 들어갔으나, 시선은 그보다 더 깊은 곳,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고정했다. 아델이 센트럴의 살롱에서 주워들은 것들을 여기서 내게 늘어놓는 꼴이라니. 그곳의 허영 섞인 자유가 북부의 칼바람 앞에서는 얼마나 가볍게 바스러지는지, 그녀는 아직 피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부의 사전엔 그런 낭만은 없어."

 

나는 펜을 책상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고, 천천히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이곳에서 외도란 곧 배신을, 배신은 곧 처형을 의미하지.(외도하면 죽인다는거니?) 살롱의 가벼운 농담 따위가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군."

 

내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분명한 경고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말한 자유가 내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시도라면, 나는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줄 용의가 있었다.

 

 

 

 


 

EP. 첫날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고요가 침실을 잠식했다. 아델은 내 품 안에 완전히 파묻힌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땀과 체온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등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씻어내지 않은 몸에서 풍기는 날것의 체취가 한데 뒤섞여 묘한 안도감을 자아냈다. 그토록 격렬했던 행위 끝에 잠들어 버린 아델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지만,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시트에 처박힌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돌려 베개 위에 뉘었다. 붉게 상기된 뺨과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눈가, 그리고 퉁퉁 부어오른 입술까지. 그 모든 흔적이 내가 방금 전까지 이 작은 여자를 얼마나 무자비하게 탐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하… ."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략적 선택이니, 외롭지 않게 해달라느니. 북부의 냉혹한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유약한 타령들이 오히려 내 포식 본능을 건드렸다는 걸, 이 여자는 꿈에도 모를 테지.

 

 

사실 그녀의 말대로 아델은 왕실과 귀족들이 내게 던져준 일종의 '미끼'이자 '족쇄'였다. 그들이 바란 건 내가 이 조약한 선물에 만족해 야성을 잃거나, 혹은 질려서 내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선물을 즐기기로 했다. 단순히 침대 위의 유희를 넘어선 무언가로 말이다.


나는 아직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걸쳐져 있던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질척한 액이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틈새가 벌어졌고, 그 사이로 내가 쏟아부은 묽은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적나라한 광경이 퍽 만족스러워 나는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델의 몸 안 가득 내 흔적을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 어떤 영토 확장보다 더 원초적인 정복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 맡에 놓여 있던 큰 수건을 집어 들어 그녀의 젖은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를 대충 닦아냈다. 꼼꼼하게 씻겨 주기엔 그녀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고, 무엇보다 내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싶지 않은 묘한 소유욕 탓이기도 했다.

 

"내일부터는 좀 더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여보."

 

나는 잠든 아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 북부는 네가 알던 평화로운 온실이 아닐 테니까. 물론, 내 침대만큼은 예외로 해 주지. 여기선 네가 원하는 대로 맘껏 어리광을 피워도 좋아."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준 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이 침실 안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아늑하고 뜨거웠다.

문득 헬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공 전하, 저 여자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북부의 겨울은 길고 혹독합니다.] 놈은 내가 아델을 며칠 데리고 놀다 버릴 장난감 취급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그동안 보여온 행보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하지만 지금 내 옆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이 여자를 보니, 놈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해야 할 건 아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토록 맹목적으로 나를 받아들이고, 내 거친 손길에 기꺼이 반응하며 매달리는 여자를 내가 과연 쉽게 놓아줄 수 있을까? 나는 잠든 아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내 커다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하얀 손이 퍽 대조적이었다.

 

"잘 자라, 나의 작은 신부."

 

나는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내일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이 음침하고 차가운 천장이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군."

 

북부의 긴 밤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고, 나는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채 이 작은 생명체의 숨소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마치 제 둥지를 지키는 사자처럼.

 


 

EP.: 센트럴의 간섭

 

 


새벽부터 시작된 연무와 순찰이 끝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책상 귀퉁이를 짓누르고 있던 서류 뭉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얹혀 있는, 황실 문장이 날카롭게 새겨진 봉투 하나가 유독 거슬렸다. 젖은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며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봉투를 뜯어내자, 예상했던 대로 황제의 친필 서명이 박힌 ‘북부 경비대 지휘권 관련 황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북부의 독립적인 군사력을 어떻게든 중앙으로 귀속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AU로만 말았는데 고능 상황 미쳤음)

 

센트럴 수비대와의 통합이라니, 말장난에 불과한 뻔한 술수였다.

 

나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서류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북부의 척박한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자들이 펜대 하나로 칼을 쥔 자들을 통제하려 드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에르빈이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갓 내린 커피와 더불어, 내가 방금 읽은 서류와 관련된 보고서들이 들려 있었다.

 

 

"센트럴에서 온 전령이 성문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황명에 대한 즉답을 원한다고 하더군요."

 

 

나는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창밖의 회색 하늘을 응시했다.

 

 

"전령이라... 제법 급했나 보군. 녀석에게 전해. 북부의 겨울은 길고,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고. 당장 답을 원한다면 밖에서 얼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해."

 

 

에르빈은 내 지시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정리했다. 황제의 칙명 따위가 내 아침을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이 상황을 북부의 입지를 굳건히 할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쓴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문득 아침에 두고 온 아델의 모습이 떠올랐다. 헬무트라는 딱딱한 바위 옆에서 기죽지 않고 뽈뽈거리고 있을지, 아니면 두려움에 떨며 성채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나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묘한 흥미를 느꼈다.

 

 

황제와의 신경전보다, 오늘 밤 내 침실에서 벌어질 작은 신부와의 술래잡기가 더 구미가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에르빈, 아델은 지금 어디 있지?"

 

내 물음에 에르빈은 잠시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헬무트 부단장과 함께 기사단 막사를 둘러보고 계십니다. 부단장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비 전하께서는 꽤... 흥미로워하시는 것 같더군요."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겁먹은 토끼인 줄 알았더니, 제법 발톱을 세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헬무트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볼만하겠군. 내버려 둬. 녀석이 얼마나 버티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나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얕은수를 받아치기 위해서는 북부 귀족들의 지지를 결속시키고, 동시에 중앙의 간섭을 명분으로 쳐낼 카드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 작은 신부(내내 작은 신부라고 하면서 귀여워함 그녀는 170이 넘는다는 설정인데도),

 

아델 역시 이 판에서 꽤 유용한 패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북부에 적응하는 속도에 따라, 황실에 보낼 답신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펜을 들어 서류 한 귀퉁이에 짧은 메모를 휘갈겼다. '판단 보류. 대공비의 안정 최우선.' 황제가 보낸 감시자가 오히려 내 방패막이가 되는 꼴이라니, 이 또한 유쾌한 아이러니였다.(아니 황제한테 저따위로)

 

아델이 헬무트에게 작게 말했다.

 

"황제의 깃발...이 성문 앞에...? 대공님께 당장 들러야겠습니다!

 

아델이 붉은 깃발을 보고 달렸다.


아델이 성문 앞에 나부끼는 황제의 붉은 깃발을 보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 귀에 들어왔다.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 동공이 가늘어졌다.(사자 수인 티내는 거 너무 좋음)

 

"대공님께 들러야겠습니다!"

 

라며 경비병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헬무트를 제쳐둔 채 냅다 성채의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그 모습이라니. 겁먹은 초식동물치고는 제법 대담한 질주였다. 나는 책상 위의 서류를 다시 한번 힐끗거렸다. '판단 보류. 대공비의 안정 최우선.' 내가 휘갈겨 쓴 메모가 무색하게도, 정작 '안정'되어야 할 대공비 본인이 가장 먼저 불안해하며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에르빈이 예고할 틈도 없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아델이 뛰어 들어왔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듬뿍 머금은 채,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선 그녀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보?

 

(비명 지름 결혼했다고 여보라고 불러주는 거니 앞으로 선결혼 후연애 에피 100개씩할거다 이거 제 친동생도 같이 봤는데 여기서 둘이 같이 부여잡고 소리지름 으ㅏㅇ아악 하고)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눈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델의 모습은 엉망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황제의 깃발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기에 이토록 필사적인지, 나는 그 저변에 깔린 감정을 읽어내려 했다. 두려움? 아니면 혹시 모를 기대?

숨 좀 고르고 말해.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턱짓으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아델은 앉을 생각도 없는 듯, 문을 닫지도 않고 성큼성큼 책상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짚었다.

 

저기, 밖에... 황성의 붉은 깃발이...

 

아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나는 책상 위에 놓인 황제의 서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걸 말하는 건가? 센트럴에서 전령이 왔더군. 꽤나 요란하게.

 

내 담담한 반응에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는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선, 복잡한 불안이 서려 있었다.

걱정 마. 황제든 누구든, 네가 내 허락 없이 이 문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에게 다가갔다. 나의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지자, 아델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어졌다. 나는 그 반응을 즐기듯,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뛰어오느라 고생했어. 덕분에 헬무트가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 네가 그렇게 날 찾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내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가자, 아델의 숨소리가 다시 한번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나는 그녀의 등 뒤로 시선을 던지며,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을 헬무트와 에르빈을 향해 나직하게 명령했다.

 

문 닫아. 대공비가 안정을 취해야겠어.

(마누라챙기는거니 대견)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는 다시금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제 오롯이 그녀와 나, 단둘뿐이었다.

 

"대공님..."

 

아델이 태제강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호칭을 고쳐서 말했다

 

"....여보. 군권문제는 당신의 소관이나 센트럴과의 마찰문제는...그것이 계속 있다면 저와 결혼하신 이유가 없잖습니까. 권력의 실체가 이제부터는 ‘힘’이 아니라 ‘운영’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센트럴은 북부를 굉장히 천박한 군견정도로 생각합니다. 황성의 전령을 저렇게 방치하시면 안됩니다. 황명에 반기를 들지 않는대신 명령이 작동하지 않게 만들어야합니다."

 

아델의 당돌한 지적에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군권, 운영, 천박한 군견. 이런 단어들이 내 눈앞의 작은 여자에게서 튀어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더군다나 ‘여보’라는 호칭에 맞춰 자신을 아내로서 정당화하려는 논리는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오는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명확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황명에 반기를 드는 무식한 방식은 하수나 쓰는 방법이지. 북부가 수 세기 동안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해 온 것이 단순히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미 설원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테니. 나는 책상 위의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음이 집무실 안의 정적을 메웠다.

 

그래서?

 

나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

 

명령이 작동하지 않게 만든다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들어나 볼까.

아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내거나 쫓아낼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상황을 유리하게 조율하고 판을 짜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단순히 깃발을 보고 뛰어온 것치고는 꽤나 깊게 생각한 모양이군. 하지만 여보, 네가 간과한 게 하나 있어.

(여보라고 박박 우기는거 너무 커엽)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그림자가 아델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자, 그녀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센트럴이 북부를 천박한 군견으로 본다고 했나? 그건 반만 맞는 말이야. 그들은 북부를 두려워해. 그래서 감히 목줄을 쥐어보겠다고 이따위 종잇조각을 보내는 거지.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손끝에 닿는 이마가 미지근하게 젖어 있었다.

 

황명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서 명령을 무력화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실현 가능한 방법이 있어야겠지. 네가 말하는 ‘운영’이라는 게, 혹시 이 종잇조각을 난로에 처넣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인가?

나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이 모순적인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북부의 안주인이라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암. 나는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말해봐. 네 머릿속에 든 그 ‘운영’이라는 게 뭔지. 설득력이 있다면, 내 기꺼이 이 황명을 네 뜻대로 처리해 주지.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녀가 단순히 감정에 휩쓸려 뛰어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판을 읽고 움직일 재목인지. 만약 후자라면,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패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내심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며, 잡은 턱에 힘을 주지 않았다. 사자의 턱 아래 놓인 먹잇감이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증명해 보일 차례였다.

 

기회는 한 번이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보.

 

“황명을 이행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황명이 북부에서 작동할 조건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서류에 적어서 보낼 근거가 어디에있는지를 확인하셔야합니다. 여보. 그러니 사절을 들여보내시고 서류확인을 하셔야합니다. 이대로라면 센트럴에서 의도한 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흥미로운 주장이군."

 

나는 팔짱을 낀 채 내 앞에서 당차게 의견을 내뱉는 아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황명을 이행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 왜곡에 가깝지 않나. 북부는 언제나 황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 왔으니까. 그걸 '조건 미충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해 서류 한 장으로 갈음하겠다는 발상은 꽤나 대담했다. 무엇보다 이 작은 여자가 '폭력'이 아닌 '운영'을 논하며, 센트럴의 무가치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지배력을 무력화하겠다는 논리를 펼치는 꼴이라니. 나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타앉았다. 아델의 눈빛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만큼은 또렷했다. 이 여자가 단순히 겁먹은 토끼가 아니라는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논리를 곱씹어 보았다.

 

"사절을 들여보내라... 그리고 서류를 확인해라. 그것이 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라는 거지?"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붉은 깃발이 그려진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나는 다시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 논리는 제법 그럴듯해. 센트럴 놈들이 북부를 야만적인 군견으로 취급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그들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세워주는 척하면서 실속을 챙기는 방식이라... 나쁘지 않아."

 

나는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아델이 움찔하며 어깨를 굳혔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 꼿꼿함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구미를 당겼다.

 

"하지만 여보(ㅋㅋ호칭 꼬박꼬박 귀엽), 말로만 떠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네가 말한 그 '운영'이라는 것이 실제로 먹혀들지, 아니면 단순한 시간 낭비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나는 손을 뻗어 아델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귓불이 열기로 뜨거웠다.

 

"좋아. 네 제안대로 하지. 전령을 들이고, 네가 말한 그 '근거' 란 것을 서류에 담아 보내도록 하겠어. 단,"

 

나는 말을 잠시 멈추고 아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만약 이 방식이 실패해서 센트럴 놈들이 더 귀찮게 군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생각이지?"

나는 아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렸다. 그녀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 순진해 보이는 여자가 과연 알까. 하지만 나는 굳이 그녀를 겁주려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북부의 안주인으로서 제 몫을 해내겠다는 그 의지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나는 관찰자로서의 흥미를 감추지 않았다.

 

"에르빈."

 

나는 시선을 아델에게서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불렀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에르빈이 즉시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문밖에 있는 전령을 접견실로 안내해라. 따뜻한 차도 한 잔 내주도록 하고. 대공비께서 센트럴의 전령을 직접 모실 것이다. 소홀함이 없어야 할 거야."

 

접견실 문 앞에는 이미 에르빈이 도착해 있었고, 문이 열리자 안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붉은 제복의 남자가 보였다.

 

여기에 대공 전하를 모셔놓고 한참을 기다리게 하다니, 북부의 예법은 이리도 무례한 것입니까?

 

사자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 높이는 꼴이라니.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북부의 겨울은 원래 굼뜬 법이지. 자작, 급한 용건이라면 서신으로 보내는 게 훨씬 빨랐을 텐데.

사절은 내 태연한 반응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감히 황제의 친서를 든 손을 떨면서도 더 이상의 항의는 삼키는 눈치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또 다른 서신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번 북부 경비대 통합 건에 대해 대공 전하의 즉각적인 협조를 원하십니다. 더 이상의 지체는 황명 거역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역이라. 단어가 좀 거슬리는군. 아까 내 아내(정말 꼬박꼬박 귀엽다ㅋㅋ)가 말하더군, 황명이 북부에서 작동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사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북부의 경비대는 단순한 군대가 아니야. 이곳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한 생존 집단이지. 센트럴의 책상물림들이 지휘권을 쥔다고 해서 그들이 움직일 거라 생각하나? 오히려 지휘 체계의 혼선으로 북부 국경이 뚫린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텐가?

 

아델이 태제강을 한참 쳐다보다가 조용히 사절에게 말했다.

 

“무기 보관 창고, 말과 차량, 식량 배급, 혹한 대응 장비까지…….”

 

아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그 모든 보급과 자원은 북부 산하에 있습니다. 황명이 아니라, 실질적인 북부의 영주가 관리하고 있어요. 이곳의 대공인, 제…… 남편의 군대를 위한 물자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황국이 센트럴에서 대공을 보낸다고 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센트럴에서 오는 카일이든, 뎀넌트든…… 누가 오더라도 황명에 따른 병력 통솔권 중 절반만 이양될 뿐이에요.”

 

아델은 마지막 말을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병참과 모든 지원부대 통신 및 물자는 전부…… 북부의 대공령, 제 남편의 소속입니다."


사절을 향해 쏘아붙이던 날 선 목소리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육중한 문이 닫히며 차단된 소음 너머로, 이 모든 소란을 잠재울 열쇠를 쥔 작은 여자가 떠올랐다. '황명이 아니라, 실질적인 북부의 영주가 모든 물자를 쥐고 있다.' 아델의 입에서 나온 이 명확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은 단순한 상황 파악을 넘어선 것이었다.

 

"황제의 병력 통솔권을 태제강으로부터 이양받는 자가 누가 온다고 하더라도, 군과 관련한 병참 물품은 대공령 소속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대공령이 정벌한 성 내의 물자를 사계절 겨울인 곳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센트럴의 장군들께서 군수품을 모두 수도에서 가져와서 쓰셔야만합니다.”

 

트럴에서 보낸 대공이 누가 되든, 그들이 쥘 수 있는 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토록 정확하게 짚어내다니. 나는 복도를 걸으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북부의 혹한이 황제의 명령서보다 무서운 이유는, 그 추위 속에 모든 생존의 자원이 꽁꽁 얼어붙어 오직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한 줌의 불씨조차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델은 본능적으로 북부 권력의 핵심이 '군권'이 아닌 '병참'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집무실 문 앞에 다다르자, 익숙한 적막이 감돌았다. 문고리를 잡는 손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문을 밀고 들어선 시야에 법전을 끌어안고 웅크린 아델의 뒷모습이 들어찼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무언가를 또 중얼거리며 종이 위에 펜을 꾹꾹 눌러 쓰고 있었다.

 

"이 곳의 대공인 나의... 남편의... 군대를 위한 모든 보급 및 자원물자를 전체 가지고 있습니다."

 

아델이 작게 읊조린 그 말이 묘한 울림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남편'이라. 그 호칭이 이토록 전략적이고도, 동시에 사적인 무게감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찾아낸 북부의 자원 조달 및 관리 규정이 적힌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 군 지휘권을 가져갈 수는 있어도, 그 군대가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기반 시설은 영주, 즉 나의 소유라는 명백한 조항들이었다.

"훌륭하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아델의 어깨가 흠칫 떨리며 고개가 돌아갔다.

 

"카일이든 뎀넌트든, 누가 오더라도 결국 내 손바닥 안이라는 소리지. 병사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면 내게 구걸해야 할 테니까."

 

나는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여전히 펜을 쥐고 있는 아델의 손등을 내 손으로 덮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손은 열기로 따뜻했다.

 

"놀라워. 센트럴에서 자란 아가씨가 병참의 중요성을 이토록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니. 솔직히 말해봐, 여보."

 

나는 상체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올리브색 눈동자를 꿰뚫듯 응시했다.

 

"이건 네가 배운 건가, 아니면 본능적으로 안 건가? 어느 쪽이든 칭찬해 주고 싶어지는군."

 

나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단순한 애정이 아닌, 일종의 인정이자 경의의 표시였다.

"네가 찾아낸 이 '명분'이라면, 저 콧대 높은 자작 놈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에 충분하겠어. 아니, 오히려 녀석이 제 발로 도망치게 만들 수도 있겠지."

 

나는 아델의 손을 놓아주고는 책상 위에 놓인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찾아낸 조항 옆에 짧은 메모를 덧붙였다. '북부 주둔군 지원 조항 제4조 2항 - 영주의 자산에 대한 배타적 권리.' 그리고 펜을 내려놓으며 다시 아델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서류는 완성됐어. 하지만 이걸 전하는 방식도 중요하지 않겠어?"

 

나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제안했다.

 

"네가 직접 전해주는 건 어때? 북부의 안주인으로서, 그리고 이 명분을 찾아낸 장본인으로서 말이야. 저 사절 놈의 얼빠진 표정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권, 네게 주지."

 

이것은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었다. 그녀를 북부의 정치판 한복판에 세우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시 내 뒤로 숨을지. 나는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아직입니다.”

 

아델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북부 경비대가 형식상 직할로 편입되더라도, 지휘권 이관 자체는 수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운용 방식은 조정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서 황성과 조율할 수 있어요”

 

그녀는 문서를 한 번 훑은 뒤,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북부 경비대를 기능별로 분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에요. 순찰대, 보급대, 통신·보고대, 그리고 동계 특수부대로 나누어 기존 북부 사병들을 재편성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그대의 산하로 두는 방식입니다.”

 

아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렇게 하면 명령 체계는 유지되면서도, 실질 운용은 분산하여 센트럴의 장군에게는 명목상의 통솔권만 주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의 숨처럼 낮게 덧붙였다.

 

“다만 이 결정은…… 여보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방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기능별 분리라. 아델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과감했다. 수백 년간 한 덩어리로 굴러가던 북부 경비대를 보급, 순찰, 통신, 그리고 동계 특수부대라는 네 가지 기능으로 쪼개버리겠다는 발상. 이것은 단순한 효율성을 넘어서, 황제가 보내는 지휘관에게 '지휘권은 주되, 실제 병력은 쓸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족쇄였다. 껍데기뿐인 지휘봉을 흔드는 사령관과, 밥줄과 정보줄을 쥐고 있는 실질적 영주 사이에서 병사들이 누구에게 충성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급대와 통신대라..."

 

나는 아델이 써 내려간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보급을 틀어쥐면 병사들의 발이 묶이고, 통신을 장악하면 지휘관의 눈과 귀가 먼다.

 

순진한 얼굴로 북부에 들어와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을 황제의 목구멍에 들이붓겠다는 이 여자의 대담함에, 나는 묘한 전율마저 느꼈다. 게다가 '동계 특수부대'라는 명칭 아래 기존 정예병들을 내 사병으로 빼돌리겠다는 계획은 소름 끼칠 정도로 북부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댄 채, 펜을 쥔 아델의 하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승인이 필요하다 했나?"

 

내 물음에 아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스스로 찾아낸 해답에 대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두 방법 중 고민할 필요 없어. 둘 다 실행해. 보급부터 틀어막고, 통신망을 분리해서 황제의 지휘관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동계 부대는... 원래부터 내 사냥개들이었으니 굳이 분류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직접 관리할 테니."

 

내 손가락이 그녀의 턱선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에 머물렀다.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영리하군, 여보. 이 정도면 단순한 승인이 아니라 포상이라도 내려야 할 판이야." 나는 칭찬을 건네면서도, 그녀가 이 판을 짠 대가로 무엇을 잃게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길을 선택한 이상, 그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공범자가 된 셈이니까.

"자, 그럼 이제 이 완벽한 작전을 실행에 옮길 차례야."

 

나는 아델의 손에서 펜을 받아 들고, 그녀가 쓴 종이 아래에 내 서명을 거침없이 휘갈겼다. 검은 잉크가 번지며 '북부 경비대 조직 개편안'이라는 이름의 덫이 완성되었다.

 

"이걸 들고 가서 그 잘난 사절 놈에게 보여줘. 북부의 대공비가 직접 고안한, 황명을 지키기 위한 '충정 어린' 대책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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