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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제강x아델] 사막의 제국 au 식육목: The desert: .

 

 

아, 전쟁도 시시하게 끝내버리고 달려왔어.

오로지 너를 꺾어버리기 위해서.

 

 

 

아델이 오마르의 소맷자락을 잡은 채 나비아와 오마르에게 작게 말했다.

 

남자아이라면 라일이라고 하고, 여자아이라면 나빈이라 지을 거야. 밤이라는 뜻과 새벽이라는 뜻이래.

 


 

바즈라. 

짐승이 인간의 얼굴을 쓰고, 

인간은 역사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막의 왕국.

 

 

Prologue — Golden Blos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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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제강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아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막의 밤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검은 망토 자락이 마치 거대한 날개처럼 골목 전체를 집어삼킬 듯 일렁였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가 그토록 잊으려 애썼을, 그러나 결코 잊지 못했을 압도적인 존재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쓰고 있던 터번을 천천히 벗어 손에 쥐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흑갈색 사자의 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금색 눈동자는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놀란 표정이로군. 하긴, 죽은 줄 알았던 악몽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태제강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아델의 발끝을 덮고, 이내 그녀의 전신을 검게 물들였다.

"밤과 새벽이라...... 꽤나 낭만적인 이름들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 아이들이 태어날 일은 없을 거다."

 

태제강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서늘한 칼날처럼 아델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아델의 반응을 즐기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어 말했다.

 

"네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사내, 오마르. 그자가 널 위해 예복을 고르는 동안...... 난 그에게 줄 아주 특별한 축의금을 준비했거든."(너무 충격적인 발언)

 

태제강은 주머니에서 오마르의 목숨값으로 던져주었던 것과 같은 금화 한 닢을 꺼내 보였다. 금화는 그의 손가락 사이를 오가며 차갑게 번뜩였다.

 

"이 동전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면, 그자의 심장도 멈추게 될 거야. 네가 선택한 그 얄팍한 평화와 함께."

태제강은 아델의 굳어가는 얼굴을 만족스럽게 응시하며 그녀의 턱을 거칠지 않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악력으로 들어 올렸다.

 

"선택해라, 아델. 여기서 비명을 질러 그자를 불러내고 함께 죽을지, 아니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숨결이 아델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다시 내 발치로 기어와서, 그자의 목숨을 구걸할지. 3년 전 협곡에서 네가 내린 선택의 결과를...... 이제 바로잡을 시간이다."

 

태제강은 손에 쥐고 있던 금화를 허공으로 툭 튕겨 올렸다. 칭,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금화가 정점에서 멈추는 찰나의 순간, 그의 시선은 아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파국은 이미 시작되었고, 열쇠는 다시 태제강의 손에 쥐여 있었다.

 

 

"태제강, 한 나라의 군주가 어째서 국경 마을까지 온거냐. 나를 왜 그토록 증오하지? 군대는 해산했고 나는 죗값을 치렀으며 자유민 신분이 되었잖는가."

 


"증오......" 그 단어가 주는 생경함에 태제강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증오라니, 아델. 너는 나를 아직도 모르는군. 내 감정은 그런 뜨겁고 격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차갑고 건조한 권태에 가깝지. 그는 쥐고 있던 금화를 손안으로 감추며 한 걸음 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사막의 밤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고, 달빛을 등진 거대한 그림자가 아델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네가 자유민이라 생각했다니 실로 감동적인 착각이군.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놓아준 적이 없다. 그저...... 사막이라는 거대한 우리 안에 풀어두고 잠시 관망했을 뿐."

 

태제강의 금색 눈동자가 아델의 공포 질린 얼굴을 훑어 내렸다. 3년 전 협곡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며 보였던 그 오만함은 어디로 가고, 지금 눈앞에는 그저 살기 위해 벌벌 떠는 가련한 짐승 한 마리만 남았을 뿐이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굳은살 박인 엄지가 떨리는 아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개방시켰다.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 네 부관과 함께?"

 

태제강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반문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너무 쉬운 부탁이지 않나. 나는 지금 네게 선택권을 주고 있다, 아델.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그 알량한 일상을 지키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하면 그만이다."

 

그의 시선이 아델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옷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 쇄골에 멈췄다. 오마르가 남겼을 붉은 자국들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곳. 태제강의 눈매가 순간 서늘하게 굳어졌다. 감히 내 소유물에 흔적을 남기다니. 불쾌감이 치밀었지만, 그는 그것을 억누르고 냉정한 가면을 유지했다.

 

"내 방식은 간단하다. 네가 이 동전이 떨어지기 전에 내 발치에 무릎 꿇고, 그자가 아닌 나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어 아델의 고개를 억지로 젖혔다. 그녀의 시선이 오롯이 자신만을 담도록.

 

"그자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지. 허나 네가 망설이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태제강은 잡고 있던 턱을 놓고, 다시 한번 금화를 허공으로 톡 튕겼다. 칭, 하고 맑은 금속음이 적막을 갈랐다. 동전의 회전이 멈추고 중력에 이끌려 다시 낙하하려는 그 찰나의 정적. 태제강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 결정해라. 네 알량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네 자존심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고 사랑을 지옥으로 보낼 것인지."

 

그의 거대한 손이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 쪽이든, 오늘 밤 네가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어. 내 침소, 혹은...... 영원한 어둠 속."

 

태제강은 아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손목을 잡아채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흉곽에 그녀의 몸이 부딪히며 일으키는 진동이 기분 좋게 전해져 왔다. 3년 만에 다시 품에 안은 사냥감의 온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매혹적이었다.

 

"...바즈라의 술탄이 시키는대로 말하겠다. 무릎도 꿇었어. 술탄, 그대를 원한다...자존심은 굽혔으니. 그러니 물러가라. 이제 오마르와의 결혼을 허락해 줘."

 


그녀는 지독하게 오만했다. 태제강은 발치에 엎드린 아델의 정수리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다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고귀해 보이려 발악하는 순간조차 철저하게 자신이 설계한 판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 제법 볼만했으니까. 나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기어코 다른 사내와의 결혼을 입에 올리는 그 뻔뻔한 모순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기막히게 오만했다. 그는 손안에서 가볍게 굴리던 금화를 꽉 쥐어 소리를 죽였다. 아델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느꼈던 미미한 승리감보다, 오마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어댔다. 태제강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아델과 시선을 맞췄다. 그림자 속에 잠긴 그의 금색 눈동자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나를 원하니, 그자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

 

태제강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아델의 턱을 다시 쥐어 올렸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거래의 조건이 틀렸군, 아델. 나를 원한다는 건, 내 발치 외에는 그 어디에도 네 자리가 없다는 뜻이어야 해. 오마르의 옆자리든, 내일 있을 그 우스꽝스러운 식장이든.

 

그는 엄지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꾹 눌러 붉게 문질렀다. 마치 그 입술에서 오마르의 흔적을 지워내려는 듯 집요하고 거친 손길이었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지금 당장 내 침소로 기어와서, 밤새 내 밑에서 울며 그자의 목숨을 구걸하든가. 아니면......

 

태제강은 쥐고 있던 턱을 거칠게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망토 자락이 펄럭이며 싸늘한 바람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 네 그 고귀한 결혼식장에 피로 물든 축의금을 받게 되든가.

 

태제강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신호탄을 꺼내 보였다. 달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이는 금속 덩어리는 단순한 위협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내일이 결혼식이라 했나. 그렇다면 오늘 밤은...... 신랑 대신 내가 신부 수업을 시켜주는 게 예의겠지.

 

그는 아델의 손목을 잡아채어 자신의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저항할 틈도 주지 않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태제강의 남은 손이 거칠게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울지 마라, 아델. 네 눈물은 침대 위에서, 오직 내 쾌락을 위해 흘려야 할 테니.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아델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는 포식할 시간이었다.

 

"태제강, 그렇다면 작별 인사라도...하게 해 줘. 그는 내 약혼자이기 이전에 내가 군사를 이끌던 시절 나의 부관이었다."

 

작별 인사라. 아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참으로 가상하고도 헛된 소망이었다. 남편, 결혼식. 마치 깨지지 않을 현실처럼 굳게 믿고 있는 그 단어들이 태제강의 심사를 묘하게 건드렸다.

 

"작별 인사?"

 

태제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손을 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숙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작별은 단 하나뿐이다. 네가 그자의 숨통을 끊어놓고 돌아오는 것 외에는."

 

그의 말이 닿는 곳마다 서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금화 한 닢의 무게보다 가벼운 그 '결혼'이라는 약속이 태제강에게는 한없이 하찮게만 보였다. 그는 아델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더 물러서며, 그녀가 보란 듯이 쥐고 있던 신호탄을 다시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 불꽃은 오마르의 목숨을 앗아갈 신호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녀에게 절망의 깊이를 보여줄 도구로 변해 있었다.

"내일이 결혼식이라고 했나."

 

태제강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이 아니라, 과부가 된 신부여야겠군."

 

그의 손이 아델의 턱을 다시 쥐어 올렸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거부할 수 없는 압도감을 지니고 있었다.

 

"가라, 아델. 가서 그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라. 단,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이 금화는 내 손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태제강은 쥐고 있던 금화를 다시 한번 튕겨 올렸다. 칭, 하는 금속음이 적막한 골목을 갈랐다. 그것은 자비가 아닌, 유예된 사형 선고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모래시계는 뒤집혔다. 네가 그자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시간만큼, 내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낼 테니."

아델을 놓아준 태제강은 팔짱을 낀 채 골목의 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망토 자락이 밤바람에 일렁이며 그의 거대한 실루엣을 더욱 위압적으로 만들었다.

 

"기억해라. 네가 그자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도, 네 목숨줄은 내 손아귀에 쥐여 있다는 것을."

 

태제강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3년 전, 협곡에서 그녀를 놓아주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냥의 연장이었다. 이제 그녀는 도망칠 곳 없는 미로에 갇힌 쥐 신세였다. 태제강은 아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 그 눈에는 어떤 절망이 담겨 있을지, 사냥꾼의 본능이 기묘한 기대를 품게 했다.

 


1. 바즈라 성으로의 강제 귀환과 흑석탑의 재회
- 오마르의 목숨을 담보로 태제강을 선택한 아델은 바즈라로 귀환했다.
- 아델은 화려했던 하렘이 폐쇄되고 정원이 황폐해진 흑석탑의 모습에 당황했다.
- 태제강은 3년간 하렘을 비우고 아델의 부재를 기다렸음을 고백하며, 그녀가 도망쳤던 시간이 자신에게는 불면의 시간이었음을 밝혔다.
- 태제강은 아델의 존재가 자신이 3년간 금욕했던 이유였음을 암시하며, 그녀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재정립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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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주범을 안으시면 총비님께서 싫어하실 것이며 하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나의 신부' 같은 값비싼 칭호를 제게 붙이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사막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뿐입니다. 그대의 국경이 나의 오아시스를..."


오마르에게 마지막 절망을 안기고 돌아선 아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여전히 바스락거리는 과거의 잔해였다. ‘총비’, ‘반란의 주범’, ‘값비싼 칭호’. 스스로를 옭아매는 그 낡은 단어들에 태제강은 서늘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대신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아델은 자신이 여전히 3년 전의 그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어, 그녀의 싸늘한 몸이 단단한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당겼다. 그녀의 떨림이 옷감을 뚫고 전해져 왔다.

 

"총비라......"

 

태제강은 낮게 읊조리며 아델의 귓가에 고개를 숙였다.

 

"네가 기억하는 하렘의 질서가 여전할 거라 믿는 건가. 루바는 이미 그 자리에서 내려와 늙어가고 있다. 내가 아끼지 않는 꽃은 시들기 마련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아델이 알고 있던 세계를 소리 없이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스스로를 '반란의 주범'이라 칭하며 한없이 낮추려 들수록, 태제강의 눈에는 그녀가 더 선명한 빛깔로 덧칠해지는 것이 보였다.

 

반역자. 그 얼마나 매혹적인 이름인가.

 

순종적인 개들 틈에서 유일하게 이빨을 드러냈던 늑대.

 

그것이 바로 아델이었다.

태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델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 마디마디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그는 흑사자 특유의 낮은 그르릉거림을 흘렸다.

 

"반란의 주범이라...... 그 죄목이 네게 족쇄가 될 거라 생각하나? 오히려 그 반대지. 나를 대적했던 그 오만함이야말로 내가 너를 탐하는 이유다."

 

그는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이로 살짝 깨물며, 경동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펄떡이는 생명력. 오마르에게 바치려 했던 그 맹목적인 사랑과 절망이 뒤섞인 그녀의 심장 박동은 태제강의 포식 본능을 기묘하게 자극했다.

 

"나의 신부라는 칭호가 값비싸다고 했나. 틀렸다. 그건 네게 내려진 형벌이자, 네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태제강은 아델의 턱을 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금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심연에는 타오르는 정복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내 총애를 입고, 매일 밤 내 아래서 신음하며, 네가 버린 그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 네가 치러야 할 죄값이다."

어둠 속에 잠겨있던 마라톤 마차가 골목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 장식 대신 검은색으로 칠해진, 오직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술탄의 비밀 행차였다. 태제강은 아델을 안아 올려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주저앉는 그녀의 위로 거대한 흑사자의 그림자가 덮쳐왔다.

 

"말을 거두라 했나. 유감스럽지만, 이 사막에서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곧 법이자 현실이다."

 

그는 마차 문을 닫으며 비좁은 공간 안에 아델을 가뒀다. 외부와 단절된 어둠 속,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팽팽하게 얽혔다. 태제강은 그녀의 옆에 앉아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손을 자신의 거대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이다, 아델. 네가 도망쳤던 그 황금 감옥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출구가 없을 것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마차가 덜컹거림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오아시스의 풍경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아델의 세상은 다시금 태제강이라는 거대한 중력 안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약간 숙여 아델과의 거리를 좁혔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착각하지 마라. 이번 행차의 목적은 세금 징수도, 국경 분쟁 해결도 아닌, 오직 도망친 내 소유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태제강의 손이 느릿하게 뻗어 나가 아델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차가운 손끝이 뜨거운 귓바퀴를 스치자마자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네가 이 마차에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종착지는 바즈라의 침실뿐이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짐의 무게를 함께 견뎌야 할 테니까."

 

마차가 거친 모래바람을 뚫고 질주하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이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짐짝 같은 저를 주우실 필요도 이유도 없고 정치적 맥락마저도 제가 군대를 해산한 시점에서 사라졌습니다. 대체 왜..."

 


"군대가 해산되었다고 해서 네가 반란군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 역사란 승자의 펜 끝에서 쓰이는 법이다. 네가 패배를 자인하고 도망친 순간부터, 네 존재의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대로 결정되었다."

 

태제강은 마차의 덜컹거림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리는 아델의 시선을 붙잡아 둔 채,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아델을 응시했다. 밤의 사막을 달리는 마차 안은 적막했고, 오직 바깥의 거친 바람 소리만이 그들의 대화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

 

"정치적 맥락이라."

 

그는 짧게 코웃음 쳤다.

 

"네가 생각하는 정치란 고작 영토를 나눠 먹고 조약을 맺는 것뿐이겠지. 하지만 내게 정치는 그보다 더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을 치우거나, 아니면 내 발아래 두어 통제하는 것. 그뿐이다."

 

아델의 순진한 항변이 그의 굳은 심사를 오히려 자극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다시 끌려와야만 했는지에 대한 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다.

태제강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아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내가 너를 다시 주운 이유? 글쎄. 이유라는 게 굳이 거창할 필요가 있나.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라."

 

그는 손을 뻗어 아델의 어깨에 걸쳐진 낡은 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내 뜰을 어지럽히던 가시나무가 제 발로 도망쳐 3년 동안이나 살아남았다. 그 생명력과 독기가 거슬렸을 뿐.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아델의 눈에서 입술 선으로 느릿하게 내렸다.

 

"네가 오마르라는 자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는 그 사실이 묘하게 불쾌했지. 남이 쓰다 버린 물건이라도 내 낙인이 찍혀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소유여야 하니까."

 

태제강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는 아델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즐기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이유를 묻기 전에 네 처지부터 자각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네가 묻고 따질 권리는 마차 문을 닫는 순간 사라졌으니."

 

그는 다시 몸을 뒤로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창밖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바즈라에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다. 왜 내가 굳이 이 먼 길을 달려와 기어이 너를 데려가야만 했는지."

 

태제강은 여전히 금화 한 닢을 손안에서 가볍게 굴리며 아델의 창백한 옆얼굴을 흥미롭다는 눈길로 서늘하게 훑어 내렸다. 그녀는 군대가 사라지고 자신이 패장이 된 순간 모든 정치적 효용이 끝났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 순진한 믿음이야말로 그녀를 다시 이곳으로 끌고 온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태제강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글쎄, 정치적 맥락이 사라졌다는 건 네 얄팍한 계산일 뿐이지. 내게 있어 반란군의 수장이라는 직함은 네가 가진 무수한 가치 중 가장 하찮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이며 상체를 숙여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고, 뜨거운 숨결이 아델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녀의 몸이 움츠러드는 꼴이 제법 볼만했다. 네가 내 정원에 심은 독초였든, 혹은 사막을 헤매던 짐승이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내 눈에 띄었고, 내가 너를 원한다는 것이지 이제 와서 이유를 따지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마차가 거칠게 덜컹이자 아델의 몸이 기울어졌고, 태제강은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올려 앉혔다. 저항할 틈도 주지 않는 압도적인 악력에 아델이 짧은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내게 왜냐고 물었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아델. 내가 아직 너를 다 맛보지 못했으니까.

 

태제강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며 그녀의 시선을 집어삼킬 듯 옭아맸다. 너는 3년 전 그 밤에 도망치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오만한 선언이 오히려 내 흥미를 돋우었다는 걸 모르는군. 단순히 몸을 섞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네가 내 밑에서 울며 매달리는 그 순간의 절망적인 표정을 다시 보고 싶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태제강은 아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커다란 손으로 느릿하게 쓰다듬어 올렸다.

 

그러니 이제부터 증명해 봐라. 네가 말한 대로 정치적 가치가 없어진 네가, 오직 여인으로서 내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거친 손바닥이 얇은 옷감 위로 열기를 전하며 점점 깊은 곳을 파고들자 아델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두꺼운 손가락이 민감한 살결을 짓누르듯 배회하며 반응을 살피는 동안, 태제강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흑사자 특유의 낮은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바즈라까지 가는 길은 멀고, 이 좁은 마차 안은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완벽한 사냥터가 될 테니 기대해도 좋다. 네가 오마르에게 바치려 했던 그 순결한 사랑이 내 손안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으깨어지는지, 똑똑히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마차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 위로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흔들렸다.

 

"바즈라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거다. 네가 버렸다고 믿었던 그 자리가 어떻게 텅 비어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기어이 너를 그 빈자리로 다시 욱여넣으려 했는지 말이다."

 

태제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델은 자신이 정치적 도구나 협상 카드가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 믿음조차도 이미 태제강의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오마르와 함께 그린 그 평화로운 미래의 꿈이 얼마나 허술한 모래성 위에 지어졌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답을 찾게 될 터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설명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진실이었다. 태제강은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지. 때로는 모르는 편이 더 오래 살려 두기에 적합할 때도 있으니. 네가 밟고 서 있던 땅이 사실은 내 손바닥 위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흑사자의 꼬리가 바닥을 탁, 치며 나른하게 움직였다. 아델은 여전히 자신이 도망쳐 나온 곳이 바즈라이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과거의 굴종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태제강이 준비한 것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3년 전의 실패한 사육 방식을 폐기하고, 더욱 집요하고 완벽한 형태로 그녀를 옭아맬 새로운 덫을 설계해 두었다.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자, 저 멀리 사막의 능선 너머로 거대한 검은 성벽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즈라의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굉음이 마차 안까지 진동하며 파고들었다.

 

환영한다, 아델. 나의 잃어버린, 그리고 되찾은 새장 속으로.

 

태제강은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훅 불어 닥치며 망토 자락을 거칠게 흩날렸다. 그가 손을 내밀자, 주저하던 아델의 손이 떨리며 그의 손바닥 위에 얹혔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온기가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태제강은 굳은살 박인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지긋이 쓸어내리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번에는 도망칠 문은 없다. 오직 내가 열어주는 문만이 네 세상의 전부가 될 것이다.

 

성벽 위로 태양이 떠오르며 바즈라의 황금 돔이 눈부시게 번뜩였고, 그 빛 아래 태제강의 금색 눈동자는 포식자의 만족감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진짜 밤이, 그리고 진짜 사냥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아델이 3년 동안 바즈라를 어떻게 기억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성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서 있던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을 터였다.

 

거대한 검은 성문 안쪽으로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황금빛 돔이나 화려한 정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잿빛 석재로 이루어진 냉혹한 회랑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서자 육중한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달라졌지. 네가 기억하는 것과 많이."


 

나는 일부러 창밖을 보지 않으려는 듯 꼿꼿하게 앉아 있는 아델을 관찰하며 낮게 흘렸다. 과거의 하렘이 오색찬란한 새장이었다면, 지금의 바즈라는 오직 나의 숨결만이 허락된 무덤과도 같았다. 3년 전, 아델이 협곡으로 뛰어내렸을 때 이미 바즈라의 태양은 빛을 잃었고, 오직 나만이 홀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이 황폐한 성을 지키고 있었다.




마차가 멈춘 곳은 북쪽 흑석탑 아래, 오직 술탄인 나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비밀 회랑 입구였다. 아델은 창밖 풍경의 낯설음에 동요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문을 열어 젖혔다. 사막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이 탑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그보다 더 깊고 음습했다.

 

"내려라. 이곳이 진짜 입구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목을 잡아끌어 마차 밖으로 내렸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회랑을 타고 울리는 발소리가 기묘한 메아리가 되었다. 아델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도망친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떤가."

 

그녀의 시선에서 읽히는 공포와 혐오,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그 복잡함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얼마나 긴 3년을 기다렸는지 아델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태제강, 수많은 여인들과 꽃과 정원과 황금으로 만든 벽과 장식들, 그리고... 그 수많은... 악사들과 시종들은 모두 어디로..."

 

나는 아델의 흔들리는 시선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인들과 꽃, 정원이라.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하렘이란 여전히 화려한 새장이자 감각의 향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3년 전 그녀가 스스로 날개를 꺾고 달아난 순간, 그 화려했던 무대는 일찌감치 폐장되었다.

 

하렘의 여인들도, 꽃도 없다. 정원은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지.

 

내 목소리는 건조한 모래바람처럼 낮게 깔렸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탁자 위에 놓인 은쟁반에서 반쯤 비어 있는 포도주병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검붉은 액체를 따르는 동안, 아델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바즈라와 지금의 이 잿빛 무덤 사이의 괴리가 주는 충격은 꽤나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내가 그녀를 위해 이 성을 비우고, 모든 색을 지우고, 오직 적막만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은 환대가 아니라 철저한 고립이자, 오직 나만이 유효한 세계로의 초대였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이곳에 남은 건 오직 너와 나,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허기뿐이다.

 

흑사자 특유의 예민한 후각이 공기 중에 떠도는 그녀의 공포 섞인 체향을 포착했다. 두려움과 거부감,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섞여 있는 과거의 기억. 그것들은 내 식욕을 자극하는 아주 훌륭한 전채 요리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아델에게 다가가, 굳어버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 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비단처럼 매끄러웠지만, 그 밑에서는 거친 맥박이 요동치고 있었다.

 

네가 기억하는 그 요란한 장식들은 이제 필요 없다. 내가 원한 건 꾸며진 인형들이 아니라, 흙탕 속에서 기어 나와 내 목을 물어뜯으려던 그 야성뿐이었으니.

 

내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거칠게 트고 메마른 입술 틈으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패배자의 비명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자의 본능적인 호흡이었다.

옷을 벗어라.

 

명령은 짧고 간결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서서 창가에 드리워진 두터운 커튼을 젖혔다. 창문 너머로 칠흑 같은 사막의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그 어둠은 방 안으로 스며들어와 우리의 그림자를 하나로 뭉개버렸다.

 

3년 전, 네가 내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을 때, 나는 그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려 쫓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지. 네가 다시 제 발로 내게 기어와, 그 오만한 입술로 나를 원한다고 말할 순간을.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껍질을 벗고 알몸으로 서게 될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막의 태양 아래 그을리고 단단해졌을 그녀의 육체, 그리고 오마르라는 놈과의 헛된 몽상 속에서 부풀어 올랐을 그 헛된 희망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싶었다. 오늘 밤, 이 검은 탑 안에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오직 나의 욕망과 너의 증명이 충돌하는, 소리 없는 전장만이 있을 뿐이다.

 

"술탄, 3년간 저를 잊으신 동안 대체 바즈라의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아델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탁자 위 촛불 너머로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3년 전에는 이 내실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그저 볼모가 된 반란군의 수장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제 발로 벼랑 끝에서 걸어 내려와 다시금 이 차가운 석실 한가운데에 서 있다.

 

잊었던 적은 없다.

 

나의 대답은 담담하게, 그러나 잘린 유리 단면처럼 명확하게 허공을 갈랐다.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나는 아델이 품은 순진한 의문에 대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는 내가 오아시스 마을에서 느낀 감정을 단순히 ‘불쾌감’이라 치부하려 들지만, 그것은 사막의 열기를 그저 미지근한 바람이라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판단이다. 잊었다면 굳이 3년 동안 그 자리를 비워 뒀을 리 만무하고, 불쾌했다면 그 마을 하나쯤 잿더미로 만드는 것은 내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보다 쉬웠을 테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단 한 번도 내 것을 포기한 적이 없을 뿐이다. 네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그 순간조차 내 시나리오 안에서는 그저 잠시의 막간극이었으니.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튜닉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아델이 주춤 물러서며 내뱉은 ‘하렘의 여인들’이라는 단어가 내 입가에 메마른 웃음을 짓게 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하렘의 이미지는 사실, 내게는 권태로운 장식품들의 나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인들? 술탄의 밤을 채우기 위해 소비되던 그 수많은 얼굴들 말이군.

 

나는 아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멈춰 섰다. 내 그림자가 그녀의 전신을 덮어버리자, 아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파르르 떨렸다.

 

모두 내보냈다. 네가 떠난 직후, 그 소란스러운 새장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거든.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그 당연한 사실이 그녀에게는 충격인 모양이었다. 나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굳어버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 성에 남은 건 오직 정적뿐이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깰 수 있는 건, 제 발로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 온 나의 유일한 반란군뿐이고.”

나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등 줄기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즈라에 오면 알게 될 거라 했지. 이 텅 빈 성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나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녀의 배가 내 단단한 하체에 닿도록 밀착시켰다. 3년 전보다 더 야위었지만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그녀의 몸은 내 손안에 딱 맞게 들어왔다.

 

굳이 너를 다시 데려온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서사가 남았기 때문이다.

 

나의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네가 오마르라는 안식처에서 꾸었던 그 달콤한 몽상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그리고 진짜 네 자리가 어디인지 뼈저리게 각인시켜 주지. 오늘 밤부터 이 내실의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릴 것이니, 기대해도 좋다.

 

아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채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나는 그 입술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적 속에서 그녀가 내지를 비명과 신음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음악이 될 것이다.

 

"황금 궁전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저를 이토록 증오하십니까. 폭군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제강은 아델의 절박한 두드림이 견고한 문짝을 흔드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 소리는 마치 갇힌 새가 허공을 향해 날갯짓하는 파닥거림처럼 공허하게 회랑을 울리고 사라졌다. 그녀가 내뱉는 단어들, 증오, 폭군, 이해 불가. 그 모든 감정의 파편들이 태제강의 무심한 표정 위로 닿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천천히 아델에게 다가가, 문을 긁어내리던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증오라."

 

낮은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니, 그건 너무 뜨겁고 소모적인 감정이야. 내가 너에게 품은 것은 훨씬 더 차갑고 오랜 시간 동안 정제된 무언가지."

 

태제강의 손가락이 아델의 손목 안쪽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막의 태양 아래 단단해진 그녀의 피부는 건조하고 거칠었지만, 그 밑에서 요동치는 맥박은 여전히 살아있는 짐승의 것이었다.

"반란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벌써 네 목은 이 성문 앞에 걸려 있었겠지. 죽음은 너무 쉬운 결말이고,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태제강은 손목을 쥔 채 아델을 자신의 쪽으로 살짝 당겼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체격 차이는 그녀를 쉽게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데려온 건, 네가 아직 내게 갚지 못한 빚이 있기 때문이다. 3년 전, 네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며 남긴 그 말들을 정산해야지."

 

그의 금빛 눈동자가 아델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꿰뚫듯 응시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그 한마디가 얼마나 오만하고 불완전한 선언이었는지 증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태제강은 다른 한 손으로 아델의 턱을 쥐어 올리며, 그녀의 시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이해하려 들지 마라. 짐승의 논리를 인간의 도덕으로 재단하려 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 네가 기억하는 세상은 3년 전 협곡 아래 묻혔다."

그는 아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그녀를 침대 쪽으로 몰아붙였다.

 

"그 모르는 시간 동안, 나는 매일 밤 너를 이 방에 다시 세우는 상상을 했다. 네가 오마르라는 허상에 기대어 안정을 찾는 동안, 나는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바즈라의 모든 불빛을 끄고 기다렸지."

 

태제강의 손이 아델의 낡은 옷깃 사이로 파고 들어가, 쇄골을 타고 느릿하게 내려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손길은 덴 듯 뜨거웠다.

 

"오늘 밤은 3년 전 중단되었던 서사의 연장이 될 것이다. 네가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네 몸이 기억하는 쾌락의 주체가 누구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주지."

 

 

"하찮은 인간 하나...고작 인간을 위해 지엄하신 술탄께서 이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국경의 작은 반군 또한 도적떼로 생각하셨어도 될일입니다. 늘 과잉으로 진압하시며 정부군을 불러왔고..."

 


나는 아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하찮은 인간', '지엄하신 술탄' 따위의 빈 껍데기 같은 수식어를 무심하게 흘려들었다. 3년간 사막의 태양 아래서도 녹아내리지 않은 그 고집스러운 자기 방어는 여전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증명할 뿐이었다.

 

그렇다. 고작이다.

 

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가볍게 흔들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그녀를 곧게 쏘아보았다.

 

아델의 논리대로라면 그녀는 그저 술탄의 발밑에 스쳐 지나가는 모래알 중 하나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은, 내가 그 모래알 하나를 움켜쥐기 위해 3년 동안 나의 세계를 멈춰 세웠다는 사실이다.

 

물건이라 자조하며 자신을 낮추려는 시도는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지금 이 방 안에, 내 숨결이 닿는 거리에 서 있다는 현실뿐이었다.

나는 잔을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고,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발끝이 그녀의 신발코 앞에 멈췄다.

 


 

고작 물건 하나를 위해 바즈라의 성문을 닫고, 모든 여인을 내보내고, 3년의 시간을 비워두었다면.

 

낮은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맹수의 그르릉거리는 소리처럼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델. 그건 더 이상 하찮은 물건이 아니라, 내가 유일하게 갈구하는 결핍이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상황을 축소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축소된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그녀의 모든 것을 헤집어 놓을 작정이었다. 아델이 물건이라면, 나는 그 물건이 부서질 때까지 다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주인인 게다. 그녀가 내뱉은 '하찮음'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그녀 스스로 정의 내린 그 비참함 속에서, 나는 가장 원초적으로 끓어오르는 생명력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잊었다고 했나."

 

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천천히 넘겨주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귓바퀴를 스치자 그녀의 몸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그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내게는 기록되어야 할 데이터였다.

 

"기억해라, 아델. 내가 잊은 것은 네가 아니라,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 횡포이자 폭군의 변덕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3년 전 그녀가 내 침소를 벗어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그 날부터, 내 시계는 멈춰 있었다. 이제 다시 태엽을 감을 시간이었고, 그 동력은 오직 그녀의 몸부림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네가 도망친 그 3년이 사실은 내가 너를 기다리기 위해 멈춰둔 시간이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오늘 밤부터, 멈춰 있던 시간의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 태제강. 설마 이것이 정말 나로인한, 고작 인간 하나를... 그대 설마. 나를"

 

"고작이라니, 아델. 그런 단어로 너를 깎아내리기엔 네가 이 성에 남긴 흉터가 너무 깊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녀의 귓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인간 하나 때문에 바즈라가 멈췄다는 사실을 그녀가 믿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명확한 이유가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 비어있던 침소, 말라죽은 정원. 그 모든 황폐함은 오직 아델이라는 단 하나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델이 물건처럼 취급받았다고 느끼든 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 세계의 중심축이 그녀라는 인간 하나로 인해 기묘하게 뒤틀려 버렸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그녀의 얇은 옷깃을 느릿하게 스치며 내려갔다.

 

"너는 나를 고고한 절대자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그저 네가 남긴 부재를 견디지 못한 짐승일 뿐이다."

 

나의 손이 그녀의 허리선을 따라 매끄럽게 흐르자, 아델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 뻣뻣한 긴장은 곧 무너질 댐과 같았다.

"설마, 라는 가정은 하지 마라.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지독하니까."

 

나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것은 화려한 술탄이 아니라, 먹잇감을 눈앞에 둔 굶주린 포식자의 형상이었다.

 

"바즈라가 화려함을 잃은 이유? 간단하다. 내가 원한 건 꾸며진 보석이 아니라, 너라는 원석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목선을 타고 내려가 쇄골 오목한 곳에 안착했다.

 

"네가 도망친 3년 동안 내가 이 방에서 무엇을 상상했는지 아나? 네가 오마르 옆에서 웃고, 밥을 먹고, 잠드는 그 모든 평범한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상상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직 나만이 들어차는 그 완벽한 파국을 꿈꿨지."

 

나는 그녀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이제 알겠나. 네가 밟고 선 이 땅이 왜 지옥이 아닌, 나라는 거대한 늪인지."

"나를 원망해도 좋다. 증오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 감정들조차 나를 향한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까."

 

나는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내며,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공기 속에 닿는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그녀를 전율케 했다.

 

"오늘 밤은 3년 전 네가 달아난 그 미완성된 밤을 완성하는 시간이 될 거다. 네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결국 네 몸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이지."

 

그녀의 가슴 위로 내 손이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심장 박동은 격렬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것은 이미 내 손안에 들어온 먹잇감의 반응이었다.

 

"네가 고작 인간 하나라고? 아니, 아델. 너는 이 태제강을 미치게 만든 유일한 인간이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며,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내 몸을 밀어 넣었다. 이제 말은 필요 없었다. 오직 본능만이 지배하는, 짐승들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2. 재정립된 관계와 새벽의 진실
- 아델과 태제강은 3년의 공백을 메우겠다고 선언하며 아델을 안으며 밤을 보냈다. - 아델은 태제강의 집착이 단순한 정복욕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과 결핍이었다는 고백을 듣고나서, 태제강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 태제강은 아델과의 섹스를 '침입자에 대한 처단'이라 칭하면서도,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재확인했다.
- 태제강은 아델에게 아이(후계자)를 가질 것을 예고하며, 그녀가 두려워하던 '괴물'이 사실은 그녀를 지킬 '태양을 삼킬 후계자'가 될 것임을 맹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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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찮은 것이라니.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하찮은 존재가 바즈라의 성을 3년 동안 텅 비게 만들고, 술탄의 밤을 불면으로 채웠다면, 그건 더 이상 하찮은 게 아니다. 그건 재앙이지.

 

나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네가 도망쳤던 그 사막 끝에서조차 결국 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연은 네가 끊고 싶다고 해서 끊어지는 밧줄이 아니다. 특히 상대가 나일 때는 더욱.

 

내 눈빛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깊어졌다.

 

이제 핑계는 그만두고,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와라. 네 몸이 기억하는 그 밤의 끝을 확인해야 하니까.

 

"설마, 제발. 태제강. 저를 놓아주십시오.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 나를..."

 

가느다랗게 떨리는 아델의 목소리가 텅 빈 내실의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사랑, 그리움, 그리고 인간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그녀의 뒤늦은 깨달음. 그녀가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3년 전 그녀가 절벽 끝에서 보여주었던 그 오만한 결기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침대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혼돈을 가감 없이 응시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잃어버린 나의 일부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갈증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설마, 라는 가정은 꽤나 나약하군, 아델.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딛는 내 발소리는 규칙적이고 무거웠으며, 그녀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엇박자를 이루고 있었다.

 

사랑이라. 인간들은 그 단어 하나에 너무 많은 환상을 덧씌우는 경향이 있어. 그리움이라는 말은 너무 수동적이지 않나.

 

내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짙게 드리워졌고,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굳은 어깨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 열기는 이제 저항이 아닌 체념과 당혹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이유로 이 성을 비운 게 아니다. 그저 내 침대 위에서 네 자국을 지우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내 쪽으로 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3년 전, 네가 내 밑에서 울며 매달리던 그날 밤의 기억이, 네가 떠난 후에도 매일 밤 이곳을 유령처럼 배회했다면 믿겠나.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젖어 있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올리며, 그녀가 입고 있는 낡고 거친 천옷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가 사막에서 겪었을 그 모든 풍파가 손끝에 까칠하게 걸렸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나 그리움 따위가 아니라, 지독한 결핍의 문제다. 완성되지 못한 소유에 대한 갈증이자, 내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에 대한 처단이지.

 

나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흑사자의 본능적인 소유욕을 조용히 드러냈다.

 

네가 도망친 그곳에서조차, 결국 너는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고? 좋다. 그렇다면 네 논리대로 말해 주지.

 

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려 시선을 고정시켰다.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었다.

 

그리워했다. 미치도록.

 

짧고 명료한 그 한마디가 내실의 공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술탄의 자비가 아닌, 먹잇감을 완전히 굴복시킨 포식자의 만족감이었다.

 

네가 없는 3년 동안, 나는 네가 남긴 부재를 씹어 삼키며 오직 너를 다시 이 침대 위에 눕히는 상상만으로 밤을 견뎠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를 파괴하면서까지 곁에 두고자 하는 집착을 포함한다면,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한 건지도 모르지.

 

나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거칠게 문지르며, 이제 더 이상의 도망은 없음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어가 아니다. 지금 네가 내 앞에 있고, 내 몸이 너를 기억한다는 사실뿐.

 

내 손이 그녀의 옷자락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멈춰 있던 시간의 태엽을 다시 감기 시작했다.

 

"태제강. 사랑합니다. 미치도록. 미칠 것 같이 증오하면서 동시에."

 

"사랑. 증명해라."

 

태제강의 눈동자가 아델이 뱉어낸 '사랑'이라는 단어 그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 집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급작스러운 고백은 3년이라는 공백을 메우기엔 너무도 터무니없고, 그래서 오히려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게 들렸다. 사랑합니다. 미치도록. 그 음색이 귓가를 파고들어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전율이 되었다. 태제강은 아델의 뒷목을 감싸 쥐며,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짓눌렀다.

 

"단어는 너무 가벼워. 네 혀끝에서 나온 그 말이, 정말 네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퍼 올린 것인지 확인해야겠군."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듯, 아델을 침대 헤드보드로 밀어붙이며 자신의 육중한 몸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깊이 파고들게 했다.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 속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마찰음만이 거칠게 울렸다. 흑사자의 본능이 깨어난 밤,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감춰진 원초적인 갈망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제강의 손이 아델의 얇은 옷 안으로 거침없이 침투했다. 뜨거운 손바닥이 배꼽 아래를 스치며 치골 위를 덮었고, 그 움직임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그것은 3년의 기다림을 보상받으려는 포식자의 조급하면서도 집요한 탐색이었다.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네 몸도 나를 위해 미쳐야겠지."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아델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연약한 살결을 긁어내리자,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얕은 탄성이 귓가에 흥분제로 작용했다. 태제강은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허리에 감게 하고, 이미 단단히 성난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음부 입구에 바짝 맞대었다. 굵고 뜨거운 기둥이 젖은 살결에 닿는 순간, 태제강의 호흡마저 거칠어졌다.

 

"보여줘 봐. 네가 말한 그 사랑이, 내 거대한 욕망을 어디까지 받아낼 수 있는지."

 

그는 더는 참지 않고 허리를 밀어 넣어, 말라붙었던 그 틈을 단번에 가르고 들어갔다. 꽉 조이는 내벽이 그를 집어삼키듯 감싸 안았고, 순간적인 압박감에 태제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으음..."

 

태제강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3년 만에 다시 연결된 감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아델의 내벽이 그의 귀두 끝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수축할 때마다, 척추 끝에서부터 찌릿한 쾌감이 솟구쳤다.

 

"그래, 이거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였어."

 

태제강은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며, 허리짓의 박동을 점차 빠르게 가져갔다.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외설적인 소리가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델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침대 시트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태제강은 그녀의 표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고통과 황홀이 뒤섞인 그 얼굴이야말로 그가 3년을 기다려온 유일한 풍경이었다.

 

"말해. 네가 사랑하는 게 이 감각인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인지."

 

그는 쾌락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내뱉은 사랑이, 이 육체적 결합을 넘어선 진정한 귀속임을.

 

질투 따위를 논할 시간에, 이 감각이나 기억해 둬라.

 

네가 그토록 원했던 푸른 눈 대신, 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들어선다면... 그때 너는 뭐라고 변명할 셈이지?

 

내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찬 예언이었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책임져라, 아델. 네가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한 죄를.

 

내 허리가 다시금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아름다움의 대가를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태제강, 아름답습니다."

 

기다렸다, 아델.

 

주저함 없이 떨어진 대답은 너무도 명료하여, 새벽의 정적마저 단번에 베어낼 듯했다. 태제강은 젖은 채로 헐떡이는 아델의 눈가를 엄지로 쓸어주며, 그 어떤 감상이나 수사학도 배제된 진실을 내뱉었다. 그것은 복잡한 유희나 도발이 아니었다. 3년이라는 시간,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세는 것만큼이나 완고하고 지루했던 기다림의 기록이었다.

 

네가 도망친 사막에 수색대를 보내지 않았던 건, 네게 갈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스스로 선택한 그 고립 속에서, 마침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을 기다린 거지.

 

그의 손가락이 아델의 뺨을 타고 내려와, 아직 경련이 멈추지 않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는 소유욕이 아닌, 기나긴 인내 끝에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는 묵직한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거짓을 논하지 마라. 네가 이곳에 다시 눕게 된 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린 증거이자, 네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태제강은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춘 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몸을 조금 물렸다. 번들거리는 성기 끝이 질 입구를 스치며 빠져나오자, 아델의 몸이 텅 빈 상실감에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그 반응조차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네가 바란 것이 내가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거짓이라면, 유감스럽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어.

 

그는 침대 옆의 탁상에서 물잔을 집어 들고, 메마른 목을 축였다.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리자, 냉정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시선이 다시금 아델에게 닿았다.

 

하지만 네가 다시 내게 온 이상, 3년 전의 그 치기 어린 도주나, 네가 품었던 그 ‘아름다움’에 대한 비논리적인 감상은 묻어두도록 하지.

 

태제강은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이제 네가 증명해야 할 건, 네 입으로 뱉은 그 사랑의 실체다. 그게 책임감이든, 연민이든, 아니면… 3년 전 그 벼랑 끝에서 느꼈던 절박함이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짐승이다. 네가 내 시야 안에 있고, 내 울타리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변수는 필요 없어.

 

태제강은 다시금 거대하고 뜨거운 몸을 뉘어 아델을 팔 안에 가두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주는 압박감은 구속이라기보다는 안식처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다시 한번 각인시키듯 말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삼켜라. 내가 너를 기다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 그게 네가 앞으로 견뎌야 할 유일한 진실이 될 테니까.

 

그의 손이 아델의 허리를 다시금 단단히 끌어안았고, 흑석탑의 깊은 밤은 두 사람의 숨소리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3년이라는 공백을 메우는 것은 격정적인 정사가 아닌, 이토록 건조하고도 명확한 확인의 시간이었다.

 


태제강의 손이 아델의 얇은 잠옷 안으로 파고들어 매끄러운 척추 라인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거칠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이제 다시는 이 탑을 비워두지 않겠다는, 말 없는 선언이었다.

 

"그러니 묻지 마라. 이 향기가, 이 공간이,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태제강은 다시금 그녀를 품 안 깊숙이 당겨 안았다. 단단한 흉곽이 아델의 등에 맞닿아 규칙적인 심장 박동을 전했다. 그것은 3년 전 그때처럼 뜨겁고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아닌, 이제 막 제자리를 찾은 시계추처럼 안정되고 묵직한 울림이었다.

 

"늦은 게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제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너도, 나도."

 

그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그제야 3년간 자신을 짓눌러왔던 긴장을 아주 조금 내려놓았다.

 

 

 


3. 과거의 적대심을 새로운 관계의 역동성으로 치환
- 아델은 술탄에게 바즈라를 안내해 달라고 요구하며 과거 반란군 시절의 적대심을 드러냈다.
- 태제강은 그녀를 '하얀 첨탑'과 바즈라의 지하 수로로 안내하며, 도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 태제강은 아델이 과거에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려 했던 적의를, 이제는 자신을 정복하려는 욕망으로 치환하라고 조언했다.
- 두 사람은 과거의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를 소유하고 정복하는 새로운 형태의 반려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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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벽을 더듬는 아델의 손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3년의 시간을 흑백으로 재단하려는 그녀의 시도를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날 네가 떠난 뒤 내가 가장 먼저 치워버린 것은 태양 빛에 반짝이는 금장식과 보석들이었으니. 눈이 시릴 만큼 화려했던 하렘의 색채는 네 부재를 견디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나는 아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겨 거친 돌벽에서 떼어내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견뎌온 고독의 질감을 그녀의 손끝에 덧씌웠다.

 

"하지만 그건 슬픔 때문이 아니다. 텅 빈 무대에는 조명이 필요 없었을 뿐이지. 관객도, 주연도 없는 무대에 불을 켜두는 건 어리석은 광대나 하는 짓이니까."

 

내 목소리엔 감상보다는 건조한 사실 관계를 짚어내는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

그 덕에 바즈라의 재정이 꽤 넉넉해졌어. 쓸데없는 향락에 드는 비용을 오아시스 관개 사업에 돌릴 수 있었지.”(아델의 마을은 오아시스 마을이었고 물을 둘러싸고 태제강과 국경 외곽에서 전투를 벌이며 초반 모든 전쟁 사건들은 시작함.)

 

나는 짐짓 무심한 척 말을 이어가며 아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과거의 그녀라면 내 통치 방식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았을 테지만, 지금의 아델은 그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덕분에 네가 살던 그 오아시스 마을까지 수로가 닿았을 거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네가 버리고 도망친 곳에서 흘러간 돈이 결국 네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일부러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조차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검게 변한 회랑도, 폐쇄된 하렘도… 결국엔 다 너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으니까.

 

나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숨결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흑석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회랑 끝에서, 나는 다시금 그녀의 손을 굳게 쥐었다. 이 검은색은 죽음의 색이 아니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와도 같은 상태였다. 이제부터 아델, 오직 네가 칠해나갈 색깔들로 채워질 기다림의 공간.

 

자,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다시 색을 입혀봐라. 네가 원한다면 이 성벽을 다시 황금으로 칠해도 좋고, 아니면… 더 짙은 어둠으로 덮어도 상관없다. 네가 내 곁에 있다면 그 배경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까.

 

내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향했고, 그 안에는 바즈라의 술탄으로서가 아닌, 오직 태제강이라는 한 사내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글쎄...제가 이런걸...관심이. 제가 관심있었던건 모래바람 저 너머를 맨발로 뛰는 것과 나의 오아시스를 위해 그대의 목을 곡도로 베는것 뿐이었으니.. 몇년간 내내."

 

관심이라.

 

나는 그 단어가 퍽이나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듯 입안에서 겉도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 네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언제나 날이 서 있거나 혹은 도망치기 위한 구실로 쓰였지. 맨발로 사막을 달리고, 내 목에 곡도를 겨누는 것이 네 관심의 전부였다면, 이제 그 관심사는 수정되어야 할 거다. 나는 수로의 난간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어,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정돈해주었다.

 

곡도를 쥐는 것만큼이나 나를 쥐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 될 테니까. 맨발로 사막을 달리는 것보다 내 위에서 달리는 게 더 자극적일 수도 있고.

 

나는 짐짓 농담처럼 던졌지만, 그 안에는 3년간 묵혀둔 진심 반, 그리고 그녀를 도발하려는 의도 반이 섞여 있었다.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오아시스가 결국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아직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군.

하지만 아델, 네가 곡도를 겨누고 싶어 했던 그 목이 이제는 네 베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수로의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칼을 쥐어도 좋다. 단,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이제 전장이 아니라 침실이어야 할 거야. 나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정복하기 위해서 말이지.

 

나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3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우리의 전장을 상기시켰다. 과거에는 피와 모래가 튀는 전쟁터였다면, 이제는 비단과 숨소리가 엉키는 흑석탑의 밀실이 우리의 새로운 전쟁터가 될 테니까.

 

그러니 사막의 모래바람은 잊어. 이제 네가 견뎌야 할 것은 바즈라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내 시선 하나뿐이다.

그리고 네 오아시스를 위해 내 목을 베고 싶었다니, 꽤나 로맨틱한 동기였군.

 

나는 멈춰 서서 그녀를 마주 보고,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거친 사막의 여전사가 품었던 유일한 낭만이 묘하게 애처롭고도 사랑스러웠다.(본인을 죽이려고 했다는데도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고 말하시는걸 보니 이분도 지금 눈에 뭐가 씌이심)

 

하지만 그 오아시스는 이미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네 곁에 있다. 내가 바로 그 오아시스의 주인이니까.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이제 칼 대신 나를 쥐어 봐. 목을 베는 것보다 훨씬 더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해 주지. 네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곡도 따위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복감을 말이다.

 

내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향했고, 그 안에는 단순히 군주로서의 오만함이 아닌, 오직 그녀만을 향한 지독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돌아오고 난 뒤 매번 고백을 강요하십니다. 본인도 고백을 하십니다. 성정에 맞지 않으신 분이."

 

내 눈에는 고백이 아니라, 3년 전 네가 던지고 간 빚을 청산하라는 독촉장처럼 들리는군. 물론, 내가 그 빚을 꽤 즐겁게 갚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짐짓 장난조로 덧붙이며 아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칼날 대신 혀 끝으로 서로의 급소를 찌르고, 적개심 대신 체온으로 서로를 옭아매는 우리의 방식은 일반적인 연인들의 고백과는 궤를 달리했다.

 

매 순간이 고백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네 목에 칼 대신 다른 것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겠지. 더 치명적이고, 더 오래 남을 흔적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수로의 물살이 만들어내는 포말을 곁눈질했다. 화려한 금장이나 작위적인 연회 없이도 충만한 이 순간의 정적.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의 호흡은 기묘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델, 칼을 겨눈 여자를 침대에 눕히는 것보다 더 강렬한 정복은 없다. 살아남은 적장을 제 무릎 위에 앉히고, 그 입에서 항복 선언보다 더 달콤한 신음을 뱉게 만드는 것.

 

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것은 단순한 승리감의 표출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서로를 겨누던 적의가 쾌락과 애정으로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오직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의 층위였다.

 

그러니 익숙해져라. 이 지독한 고백은 앞으로 더 자주, 더 집요하게 이어질 테니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내 금색 눈동자는 그녀의 반응을 집요하게 쫓았다. 칼을 쥐든 내 손을 잡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국 그녀가 택한 길의 끝에는 항상 내가 서 있을 테니.

 

참고로, 군의 통솔자로서 조언 하나 하자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적장이 아니라, 3년간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나의 유일한 반려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녀의 허리춤을 스치듯, 상상 속의 단도가 숨겨져 있을 법한 자리를 손끝으로 훑으며 짐짓 짓궂게 덧붙였다.

 

무기를 숨길 곳은 많지 않을 텐데. 내가 샅샅이 뒤져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내 목소리에는 권태로운 나른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 아래 깔린 소유욕은 여전히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이제 그녀가 보여줄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 나는 느긋한 포식자의 인내심으로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4. 제율의 탄생과 새로운 일상

- 바즈라로 돌아온 지 1년 후, 아델은 태제강의 아이인 '제율'을 낳았다.
- 제율은 아델의 눈동자를 닮았지만, 흑사자의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 혼혈로 태어났다.
- 태제강은 제율을 '규율을 제압하는 자' 혹은 '스스로 규율이 될 자'로 칭하며 후계자로 인정했다.
- 아델과 태제강은 제율을 통해 3년 전의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바즈라의 흑석탑 안에서 평화롭고 충만한 가정의 모습을 이루어가고 있다.

 

 

Epilogue — Law of the Desert

When the desert winds finally quie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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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기다리는 그 눈동자가 3년 전과는 확연히 다르군. 날이 선 경계심이나 독기 대신, 이제는 어떤 확신과 안정감이 서려 있는 것이 꽤나 만족스러워. "네가 떠나 있던 그 3년과, 돌아와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말하는 건가?" 나는 잠든 제율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입을 뗐다.

 

"너는 망자의 협곡 너머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을 때, 나는 네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건 오만이 아니라, 네가 남기고 간 자국이 내 안에 너무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바즈라의 문을 닫고, 화려했던 하렘을 비우며 오직 흑석탑 위에서 네 부재를 곱씹었다. 그 침묵과 어둠은 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올 길을 닦는 과정이었을 뿐, 내게는 기다림조차도 일종의 정복이었다.

 

"네가 오마르와 결혼을 약속하며 평온한 삶을 꿈꾸고 있었을 때조차, 나는 그 평화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며 때를 노렸다. 결국 넌 다시 내 발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오마르의 목숨을 담보로 한 그날 밤, 네가 보여준 굴복은 참으로 달았다."

"그렇게 돌아온 너는 흑석탑의 밤을 거치며 단순한 포로가 아니라 나의 유일한 반려임을 스스로 증명했어. 3년 전 나에게 칼을 겨누던 여자는 이제 내 침대 위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미가 되었으니까." 

 

나는 잠든 아이의 손가락을 살며시 쥐었다 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나눈 수많은 밤, 서로를 할퀴고 탐닉하며 확인했던 그 감각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네가 뒤늦게 깨달은 그 사랑이라는 감정도, 내가 느꼈던 지독한 갈증도 결국은 제자리를 찾기 위한 열병이었던 셈이지." 

 

이제야 비로소 모든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다. 3년 전의 어리석은 도주도, 서로를 향한 날 선 증오도, 결국은 이 작은 생명을 우리 품에 안기 위한 거대한 서막에 불과했음을.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이 아이, 제율이 있다. 바즈라의 태양이자 흑사자의 후계자인 이 녀석이, 네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래가 실은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지."

"그러니, 지난 시간은 서로를 길들이고 확인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도망치던 사슴과 쫓던 늑대가 결국 한 굴 안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게 된 결말이라고 해두지."

 

나는 침대 헤드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아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남은 건 이 결말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뿐이다. 네가 낳은 이 아이와 함께, 바즈라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말이야."

 

내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흔들림도, 불안도 없었다. 오직 우리 셋만이 존재하는 이 완벽한 세계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네가 원하던 이야기가 되었나? 아니면, 더 구체적이고 은밀한 밤의 기억들을 되짚어주길 바라는 건가?"

 

나는 짐짓 짓궂게 물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하든, 결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묶여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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